계간평
위선과 진정성 사이에서
송기한 (문학평론가)
인간에게, 혹은 사회에 양면적 속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모른다고 했거니와 이런 판단 유보가 말해주는 것조차 또 다른 양면성의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속성들은 어느 특정 존재에게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이라는 유토피아로부터 추방될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그것을 오이디푸스의 콤플렉스로 설명한 바 있거니와 그 뒤를 계승한 라캉은 이를 거울의 속성에서 그 특징적인 단면을 찾아낸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서구의 정신사에만 국한되는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라캉보다 한발 앞서 거울상 단계를 설정하여 인간의 분열된 국면을 이해한 시인 이상의 경우에서도 이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은 주로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이를 보다 확대해 나가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는 다층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러한 삶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들 역시 위선의 자장으로부터 크게 자유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 살고 있기에 이른바 타자성에 대해 굳이 문제 삼을 것도, 또 크게 신경 쓸 일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신의 구조적 분열 못지 않게 우리는 자신의 자족감이랄까 완결성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부정성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이 물질적 요소들의 등장이었다. 물질이라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에 정신은 더 큰 분열의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그런 상위가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위선의 감각이고 자아 정체성의 상실이다. 위선은 가짜이고 속이는 것이며, 허위의식이다. 이런 정서가 본질 속에 녹아들어 가게 되면, 그리하여 그 가면이 벗겨지게 되면, 이를 감각하는 주체는 끝없는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런 정서들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부분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면, 이후에 다가오는 좌절의 정서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들이 가짜의 정서, 곧 위선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15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과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 간 선물 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으며, 거실 한가운데 턱하니 걸려 있는 C.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머, 저 개들 좀 봐. 개들인 주제에 인간인 척 열심히 포커 게임 중이네, 기분 묘하게도 우리처럼 딱 일곱 마리네. 하기는 요즘엔 인간이나 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니 개가 인간인 척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지.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 판 칠까? 그러고선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 한들---.
-김상미, 「포커치는 개들」, 시현실 2019년 봄호
소시민의 일상이 무척이나 주목받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1970년대가 그러했다. 조국 근대화의 바람이 휘몰아친 것도 이때였고, 그에 따른 산업현장이란 것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도 이 시기였다. 작은 단계의 산업화는 조그만 물질의 행복을 만들어냈고, 이 행복 속으로 걸어들어가고자 했던 욕망의 표현들이 소시민들의 단면을 이루었다. 소설가 이선은 일찍이 행촌아파트에서 이런 소시민들의 군상을 탁월하게 묘사해낸 바 있다. 그것이 70년대 후반의 삶이었는데, 그 이후 5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 소시민의 일상은 여전히 유효한 채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김상미의 「포커치는 개들」은 그러한 소시민의 일상을 위선의 맥락에서 읽어낸다. 위선은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이를 은폐한다. 진실을 포착해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현재의 상황을 헤쳐나갈 추동력이 없기에 차라리 숨겨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위선의 의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과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복의 상상력이다. 과장은 현재의 상태를 과도하게 부풀려 상대방의 시선을 흐리게 한다. 아니 상대방의 판단을 어지럽게 하여 표면에 드러난 것조차 진실인 양 믿게 만든다. 반면 전복의 상상력은 자리바꿈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두 개의 사물이나 상황이 교묘하게 자리를 바꾸어서 대상을 마치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 전복의 상상력이다.
「포커치는 개들」에는 이 두 가지 의장이 절묘하게 어우러짐으로써 진실이 가려진 경우이다. 진실은 사라지고 오직 가짜만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개가 포커를 치든 인간이 개가 된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가짜 뉴스가 여과 없이 떠돌아다니고 위선이 진실을 견고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고 보면, 「포커치는 개들」이 표명하는 이런 상상력은 시대의식의 명확한 표현이지 않겠는가.
흰 몸에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는 게
누에들이 띄엄띄엄 누워
잠을 청하는 것 같다
가슴에는 지갑을 움켜잡고
손목에는 열쇠번호까지 차고
잠을 청하는 누에들은
끝내 깊은 잠에 들지 못하리라
먼 길 가는 사람들이 여관 대신
찜질방에 들어 땀을 좀 흘리다가
뽕잎을 씹듯이 적막을 씹으며
잘 채비를 서두른다
잠을 청하지만 이내 잠 못 들어
고개를 들고 기웃기웃하다가
다시 엎드려 구직광고를 펼쳐놓고
휴대폰을 연신 두드리는
젊은 누에들은 2령이다
밤 깊어 푸르스름한 실내는
푸른 뽕잎들의 그늘 속
날이 새자 그 많은 뽕잎들은 안개처럼 개고
흡사 5령 잠을 빠져나온 누에들처럼
여자들은 고치 속에서 나와 나비 되어 날아가고
몸이 무거운 성인 남자들만 여기저기 노숙처럼 흩어져
운동 기구들 아래 뒹굴고 있다
-박정남, 「찜질방의 누에들」, 시사사 2018년 9-10
위선과 가짜의 상상력이 지금 이 시대의 한 표정이라는 것을 「포커치는 개들」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찜질방의 노예들」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는데, 그러나 여기서의 위선은 남을 속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도 아니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모습을 두 가지 일상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의장은 비유에 가까운데, 의도적으로 은폐시킨 단면이 없다는 점에서 가짜의 정서로부터는 저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이 시의 주된 배경은 찜질방의 풍경이다. 우리 사회에서 찜질방은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데, 하나는 건강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박의 기능이다. 어찌 보면 두 기능은 닮은 듯하면서도 또 동일하지 않다. 특히 이곳에서의 숙박이란 건강이라는 전자의 정서와는 현격히 차이가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 문화는 우리 사회의 주된 모습 가운데 하나로 자리한 지 오래이다. 시인은 이런 찜질방의 모습에 주목하여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포착해낸 찜질방의 풍경은 의외로 단순하지가 않다. 건강 증진과 하루 만의 숙박을 위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여기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이렇게 또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면서 지금 이곳의 풍경을 담담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먼 길 가는 사람이 여관 대신에 선택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들 가운데는 구직을 위한 사람도 있고, 평범한 여자들도 있으며, 몸이 무거운 성인 남성들도 있는 등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이들은 나비와 같이 날아가기도 하고 운동 기구로 달려가 또 다른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이들의 모습은 모두 누에로 비유되는데, 여러 번의 변신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초의 누에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반면 하루 만의 위안이나 평안을 찾는 모습이 마치 누에들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해서 이들을 누에로 비유했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일상의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군상들이 아닌가. 누에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난 존재들이 바로 찜질방을 전전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실을 과장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포커치는 개들과 다르지만 현대인들의 군상을 누에라는 가면을 통해 읽어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충분한 몸짓의 존재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그놈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를까 겁난다
그에게로 가서 내가 그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로 그 무엇이 되고 싶진 않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고스란히 눈 뜨고 싶을 뿐이다.
-이하석, 「이름-김춘수를 그리며」, 시와 정신 2019년 봄호
인용시는 잘 알려진 김춘수의 작품 「꽃」을 모방한 작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포스트모던의 기법 가운데 하나인 상호텍스트성의 기법을 차용한 경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의장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함의하는 내용은 전연 다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기존에 형성된 권위를 끌어내리고 견고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인데, 이 작품은 그런 효과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김춘수의 「꽃」이 담아내고 있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한 경우이다.
김춘수의 「꽃」은 나와 타자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통해 존재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읊고 있는 시이다. 나는 타자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또 타자의 그러한 명명에 따라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바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존재는 새롭게 변신을 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의미 있는 것, 개념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이하석의 「이름」은 김춘수가 말한 존재의 의미와는 좀 다르게 구상화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존재가 새롭게 변신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명명의 행위에 의한 의미의 전복은 전연 다르다. 김춘수의 부름, 곧 명명은 구속이 없는 변신이지만 이하석의 그것은 구속이 있는 변신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놈’이 주는 전언이 그러하다. 이를 두고 세속적인 욕설의 범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거니와 여기에는 구속의 의미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충분한 몸집의 존재였다”라는 진술은 그 역의 표현이다. “나의 그”가 됨으로써 그는 더 이상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그놈’이 됨으로써 존재의 상실을 원치 않는 시대의 고민이 담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서정적 자아는 ‘~인 척’하는 위선도, ‘누에’로 비유되는 가면도 아닌, 오직 본질 그 자체로 구현되는 존재로 남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만이 가짜와 위선이 판치는 이 시대에 진정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몸부림은 자율적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 시대의 반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철역 물품보관함 안에서 강아지가 울고 있다
안녕이 이토록 낯선지
공처럼 동그랗게 웅크린 불안은 몇 킬로그램인가
가던 길을 멈춰 서며 내가 저렇지
맛있는 개껌을 준다기에
꼬리를 꽃 모양으로 감으며
공손히 두 손을 받치라기에
뛰쳐나오는 소리와 발톱을 자르며
화분처럼 나를 묻어버리기를 몇 십 년
몸속으로 어떤 꽃이 지나
불꽃이고 싶든 코끼리이고 싶든
칸마다 지문을 덧댈 뿐
내가 왜 있는지 모르고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다가 닫히는 손길
길들어질수록 목이 쉬고
소리가 없으니 있어도 없는 나는 벽이 되고 있다
자물쇠를 물고 있다
방부제 같은 바람이 문고리를 비틀까
모서리가 많은 내 모습
역행하면 아기가 될까
나는 지금 어디에 유기되어 있는가
-박수빈, 「사물함 기르기」, 시현실 2019년 봄호
애초에 가지고 있는 원형질보다 자신을 크게 드러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를 숨기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전자가 과장이라면, 후자는 축소가 될 터인데, 「포커치는 개들」이 과장의 모습이라면, 「사물함 기르기」는 후자를 대변한다. 그러나 있는 본질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어떻든 자신의 본질을 감추는 것 역시 또 다른 은폐이며, 본질 감추기이다. 「사물함 기르기」는 물품보관함에 갇힌 강아지를 통해서 현재의 자아를 매우 재미있게 읽어낸 경우이다. 곧 물품보관함에 있는 강아지의 처지나 서정적 자아의 처지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이둘은 현실의 조건에 만족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열악한 조건을 개껌이라는 당근을 통해서 억지로 뛰어넘고자 노력할 뿐이다.
강아지가 그런 것처럼 현실의 자아도 강아지의 처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이해한다. 두손 가득히 던져주는, 달콤한 당근에 서정적 자아는 “뛰쳐나오는 소리와 발톱을 자르고” “화분처럼 나를 묻어버리기를 몇십 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자아 모습을 잃어버리고 그저 공손히 수긍만 하는 비저항적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자동성을 잃어버리고 상대방이 던져주는 달콤한 당근에 이끌어리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놈’이 되기 싫어 “누가 불러주는 것이 두려웠던”(「이름」) 충분한 몸짓의 자아, 곧 자율적 자아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녔기에 자아는 내부로만 계속 움츠러들고 자신을 가려주는 가면을 찾아서, 다시 말해 자신을 숨겨줄 은폐된 공간을 찾아서 움직이게 된다. 그 움직임의 끝에 놓여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자신의 현존이 어디에 실존을 박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유기되어 있는가” 하는 반문은 그러한 현존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현대인의 실존을 일러주는 가면의 모습은 밖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과정을 겪든지 본질은 여전히 가리운 채, 현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하나, 당신 하나
나 둘, 당신 둘
나 셋, 당신 셋
우리는 같았을까
나 하늘, 당신 땅
나 구름, 당신 바람
나 천둥, 당신 번개
우리가 항상 쌍이면,
나 오른쪽, 당신 왼쪽
나 앞, 당신 뒤
나 밖, 당신 속
우리가 항상 대칭이면
내 안엔 당신
당신 안엔 나
(중략)
그래서, 사랑은, 결국
태초에 하나였거나, 아니면, 하나가 아니였거나 하게 되어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당신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당신 넷
우리는, 같이, 무한한 별들을
반복적으로 무한히 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영원히
-이문근, 「사랑은 태초에」, 문예연구 2019년 봄호
존재는 관계 속에서 보다 뚜렷한 모습을 갖게 된다. 본질을 감춘 상태이든 혹은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이든 간에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은 위선, 은폐, 가면 등등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제대로 된 진정성, 올바른 진실이란 이 가면들이 벗겨질 때, 비로소 드러날 수 있고, 또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태초에」는 관계를 통해서 존재가 어떻게 변신되는가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 시이다. “나 하나, 당신 하나”에서 두 사람에게 동일한 질량이 주어지면, ‘우리는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고, “나 하늘, 당신 땅”에서 보듯 동일한 질서로 묶이게 되면, ‘우리는 한 쌍’이 된다. 뿐만 아니라 ‘나 오른쪽, 당신 왼쪽’이면 ‘우리는 대칭’의 관계로 전이된다. 결국 “내 안에 당신/당신 안엔 나”로 되면, 우리는 반사적 존재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그 역도 참이 되는데, 곧 다른 함량이나 다른 관계 쌍, 다른 반사 관계가 주어질 때, 우리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와 타자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비로소 온전한 자립체가 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는 영원하지가 않다. 또 생각의 방향에 따라서 관계는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고 탄생할 수 있다. 시적 자아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은 이런 가변성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유의 물결을 따라서 마지막에 이른 것이 태초이다. 하지만 태초에 이르러서도 자아의 고민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의문부호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아는 다만 끊임없이 탐구할 뿐이다. 나는 오직 타자라는 가면을 통해서만 비로소 올바른 정형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설사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만족감을 느끼거나 이를 목표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또 그것이 이 시대의 절대적인 가치라고 인정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아는 위선이나 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는 누구인가에 대해 반문하게 되고 지금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그래야만 가변적인 현실에서 자아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는 서정의 유토피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