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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4 14:43:45 (*.70.19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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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 만들기>
부정을 위한 부정행위
글쓴이 이문근(전북대학교, 전자정보공학부) |
정직이라는 이름 앞에
철저히 파괴된 자신과의 싸움,
무능해지기 전에,
무지해지기 전에,
생명과 교환하는 파우스트의 지식처럼
결과를 위해 양심을 파는 필요와 욕망의 선택,
단지 현실이라는 명분 때문에
극대화된 실존적 가치 때문에
상실되는 자아,
거부되는 자아,
결국,
그 결과는
무관심과 같다.
철저히 파괴된 자신과의 싸움,
무능해지기 전에,
무지해지기 전에,
생명과 교환하는 파우스트의 지식처럼
결과를 위해 양심을 파는 필요와 욕망의 선택,
단지 현실이라는 명분 때문에
극대화된 실존적 가치 때문에
상실되는 자아,
거부되는 자아,
결국,
그 결과는
무관심과 같다.
요즘 수능부정행위 때문에 청소년들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를 단순히 각 청소년 개인들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행태가 어른들의 사회적 범죄처럼 조직화되고 체계화된다는 점이 단순한 청소년들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행위를 유발시켰던 직접적인 방법과 수단을 거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부정행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면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구축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사회적 가치와 현실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런 점을 간과할 수 없는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골스러운 중학교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전주 평화동에 있었다. 학교는 학산 중턱에 걸쳐 있었고, 그 뒤에는 소나무가 꽉 들어찬 옥녀봉이 있었고, 그 능선을 넘어서면 멀리 모악산이 보였다. 학교 앞으로는 산 중턱에서 길 초입까지 5백여 미터 정도의 길이 나 있었고, 주위엔 논, 밭, 과수원 등이 펼쳐졌고, 그 배경에는 완산칠봉이 버티고 서 있었던, 정말 지금 생각해봐도 환상적으로 시골스러운 풍경이었다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아침 일찍 학교에 오면 학교 운동장에서부터 완산칠봉까지 고요한 호수처럼 펼쳐지던, 그리고 아침 햇살과 함께, 구이 방면으로 하나둘 지나가는 버스들의 움직임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지는 운무, 하교 길에 삼천천 너머 귀신사 뒷산으로 넘어가는 태양과 노을, 봄이면 모내기를 하면서 들려오는 풍물소리, 여름이면 뙤약볕 아래서 멀리 장승백이를 넘어오는 버스가 날리는 뿌연 먼지, 수업 시간이면 시끄럽게 재잘대던 새소리들, …. 가슴 속엔 너무도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이 가득 남아 있다. 하지만 항상 이런 그리운 추억을 되새길 때마다, 이 그리움을 깨트리는 씁쓸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
체벌의 악몽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XXX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누구도 그를 XXX라고 부르지 않고 X곤조라고 불렀다. 이렇게 불러지게 된 이유는 1학년 동안 그에게 당한 잔인함 때문이었다. 그는 1학년 때 수학을 담당했었다. 그의 수업 방식은 무척 특이했다. 어떤 사안이든지 그는 그의 맘에 들지 않으면 매우 독특한 방식의 처벌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체벌은 시각적으로 학생들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있으면 분필, 지우개, 교편(포인터: pointer) 등을 그 학생의 머리를 향해 날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종아리를 때려도 그냥 때리지 않았다. 꼭 교단 위에 걸상을 놓고 학생이 그 위에 서서 종아리가 드러나게 하고서, 그 학생의 종아리를 때렸다. 조용한 교실에서 달랑 혼자 그 위에 올라가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학생과 허약한 종아리, 그 위를 바람을 가르듯 때려 치는 회초리의 소리와 종아리에 부딪치는 육질적 타성, 아픔과 고통에 몸을 비비꼬면서 몸부림치는 학생의 절규. 교실은 정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설 정도의 정막과 냉기가 흐르는 그런 참담함 뿐이었다. 허벅지를 때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을 꼭 교단 난간에 서서 몸을 칠판에 기우려 손으로 칠판 끝을 잡아 몸을 지탱하게 하고 학생의 허벅지를 때렸다. 이때는 정말 몽둥이를 들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 퍽퍽거리며 학생의 허벅지에 떨어지는 몽둥이 소리,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끙끙대는 학생의 신음, 온몸을 고통 때문에 비비 꼬는 학생의 몸부림, 그리고 참다못해 바닥에 쓰러져 터뜨리는 울음 소리. 이런 교실의 분위기는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떤 학생은 허벅지가 어떻게 부었는지 바지를 제대로 입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체벌은 정말 기본의 기본이었다. 그는 이런 기본 체벌 외에도 독특한 체벌을 무참히 행사했다.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을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에 각목을 끼고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앉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이라도 자세가 흩어지면, 허벅지를 검도 하듯 교편으로 내려쳤다. 말이 교편이지 교편이 대나무 뿌리로 만들어져, 한 대 맞으면 한 폭의 남인 동양화가 허벅지 위에 적나라하게 부각으로 그려졌다. 또 다른 체벌은 원산폭격이다. 이건 너무 쉬운 체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응용능력이 풍부해서, 그 원산폭격 자세에서 원 그리기를 시켰다. 이건 정말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원을 그릴 때마다 머리 끝 정점, 즉 백회혈이 있는 정수리가 나무로 된 교실 바닥 중 좀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에 맞추어졌을 때, 머리 표피에 바늘 같은 나무 조각들이 박히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머리 뒷골에서 태양혈, 뒷골, 목, 인파선을 타고 귀가 멍멍하고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찌릇찌릇 쭈삣쭈삣 신경과 감각을 짓이겨가며 퍼져나가는 그 고통.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한 건, 모래바닥이나 콩크리트에서 원산폭격으로 돌리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몇 번 돌고 나면 정수리에 정말 피가 맺혔다. 정말 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잔인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뺨 때리기는 보통이었다. 그는 그가 학생의 뺨을 직접 때리기도 하지만, 학생이 학생의 뺨을 때리게 하는 응용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즉 문제가 있는 학생 둘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서로의 뺨을 번갈아 가면서 때리게 하는 것이었다. 같은 교우로서 어떻게 친구의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어김없이 그 학생들의 소박하고 여린 감정을 사정없이 잔인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두 학생 중 상대방의 뺨을 약하게 때리는 학생의 뺨에 그의 손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때리고 나면, 두 학생들은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더욱 더 강도를 높여가며 서로의 뺨을 번갈아 가며 때리는, 정말 동물적인 본능과 교우에 대한 처절한 배신과 억울함이 뼈에 각인되는 경험을 톡톡히 치르게 했다. 이런 상황은 교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꽁꽁 얼어붙은 심정에서 우정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생존하기 위한 개인주의의 절대적 필요성을 비겁하게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몇일 동안 그 두 학생의 부르튼 얼굴을 볼 때마다 누가 그의 잔인함을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학생들에게는 이런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사용하는 이런 체벌들은 모두 군대에서 배운 것들이라고. 하지만 그는 지병 때문에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고, 그의 전공도 수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성적이라는 절대가치
이런 그가 2학년 담임이 되고나서 우리 반 학생들은 그의 성격과 습성을 더욱더 잘 알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성격 중의 하나는 그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가 맡은 반, 즉 우리 반이 공부도, 운동도, 다른 반보다 ‘무조건’(!) 잘해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험이나 운동회가 되면 학생들은 항상 긴장을 했다. 특히 중간고사나 학기말고사 같은 시험을 보고나면 그 결과를 놓고 위에서 기술한 체벌을 두 단계로 받아야 했다. 첫째는 개인 체벌이었다. 이는 개인의 성적과 결과에 대한 체발이었다. 개인의 성적이 좋으면 그 만큼 체벌의 강도가 적었다. 둘째는 집단 체벌이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기준이 있었다. 반별 성적과 상위권 성적이었다. 반별 성적은 반평균 성적을 의미하며, 상위권 성적은 반에서 전체 상위권에 속한 우리 반 학생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준에 의하면 모두 개인 성적에 준한 체벌, 반별 성적에 준한 체벌이라는 2중의 체벌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서 성적이 상위인 집단과 하위인 집단은 반별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반 평균성적에 미친 정도에 따른 제3의 체벌을 받아야 했다. 하위권 학생은 반별 성적을 하향시켰다는 명분으로, 상위권 학생은 반별 성적을 상향시키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체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에서 전체 1, 2, 3등의 상위권이 나오지 않을 경우, 상위권중의 상위권은 제4의 체벌을 감수해야 했다. 하여튼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이런저런 기준으로 엄청나게, 말 그대로, ‘터졌다’. 체벌 기준에 속한 학생들이 우~ 복도로 몰려나가 줄을 서고, 하나씩 교실 앞문으로 들어와 몽둥이로 허벅지에 매를 맞고, 매를 맞은 학생들은 거의 구르다시피 책상으로 돌아와 끙끙대며 허벅지를 만지며, 또 다른 체벌 기준을 발표하면 우~ 밖으로 몰려나가, 한명씩 앞문으로 들어와 얻어터지고, ….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정말 교실은 신음과 울음으로 뒤범벅이 된 지옥이 되고 말았다. 과연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학생은 과연 몇이나 될까? 오직 최고만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 앞에 많은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서서히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에게 당한만큼 어디에선가 당한대로, 아니 그 이상 누구에겐가 사고를 치고 다녔다.
절대가치를 위한 집단행동
자극에는 대부분 반응이 있는 법. 특히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1학기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우리는 이런 식의 체벌을 최소화하고자 몇몇의 상위권 학생들과 하위권 학생들이 모여 담합을 했다. 국어, 영어, 수학, 물상, 생물 등 몇 개의 과목을 정해 놓고 상위권 학생들은 각자 자신 있는 과목을 책임지고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험시간의 그 하위권 학생들의 자리 배치도 면밀하게 준비했다. 문제는 풀되 자신이 맡은 과목의 시험 답안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작성해 나머지 학생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배포를 위한 답안 작성 및 배포 방식까지 면밀하게 준비하고 연습했다. 모든 것은 계획한 바대로 이루어졌다. 결과는 반별 성적 1위, 반 상위권이 전체 상위권 1, 2, 3, 5등 확보. 하위권 학생들의 대대적인 성적 향상, 즉 준상위권에의 돌입. 대대적인 쾌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결과가 그의 체벌 원칙의 결과인 듯 아주 자신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자신의 기쁜 심정을 조회시간에 거침없이 토로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월등한 성적 향상을 가져온 학생들에게 그 성적 향상의 직접적인 원인과 동기를 학생 모두에게 이야기해 다음 시험에는 반 전체 학생들이 그런 향상을 모두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고 모든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라고 강요했다. 그리나 학생들은 너무도 당당하게 그 직접적인 원인이 ‘컨닝’이며, ‘컨닝’의 동기는 그가 원하는 그 최고를 성취하기 위해서였고, 결과 체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고 자신과 의기로 고백했다. ‘컨닝했습니다!’ 라는 말과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도 교실 분위기는 한마디로 꽁꽁 얼어붙어 쥐 죽은 듯 누구 하나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썰렁하다고 해야 하나?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기가 막히다고 해야 하나, 미쳤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죽으려고 환장했다고 해야 하나, …. 하여튼 고백의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주도자들은 문제아로 찍히고 말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고등학교를 입학해서도.
‘하면 된다’?
전문성이 중요한 것은 그 분야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대상이 처한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실험적, 통계적, 이론적으로 관찰, 이해, 정의 및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일반적으로 전문가의 의무이자 특권이지 않을까? 14~16살(정말 어린 나이다!) 때의 중학교에서 내가 친구들과 함께 체험했던 이러한 교육은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의 잔재와 군부독재식의 교육이었다. 특정 목적을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이는 교육. 그 교육에는 다양성이나 객체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교육은 획일화된 그리고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교육이었다. 과정 속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단계나 절차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그 결과가 좋으면 어떤 부정적 과정도 정당화 될 수 있었다. 역으로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떤 정당한 과정도 정당화 될 수 없었다. 2학년 우리 담임을 맡았던 그의 교육 방식과 철학은 이런 결과론적 교육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니었을까? 이런 그의 철학은 그가 정한 우리 반의 교훈을 보면 쉽게 이해할 있었다. 그 교훈은 ‘하면 된다’ 였다. 이 교훈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말에는 무서운 독재적, 파쇼적 논리가 숨어 있었다. 즉 그 말에는, 만약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 이유는 결국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무서운 책임 논리가 숨어 있었다. 또 여기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면 된다’ 라는 역논리가 숨어 있었다. 즉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비교육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교육. 이런 교육을 나는 중학교 1학년, 2학년, 그리고 다음 해인 3학년 동안 온몸으로 처절하게 체험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중학교 교육의 목적은 단지 ‘좋은’ 고등학교 진학이라는 결과만을 위한 교육이었다고 생각한다.
‘좋다’ 교육의 인간 소외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교육의 사전적 의미나 역할을 절대적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교육을 통해 나는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원활히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지식과 기능과 수단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결과에 불과 했다. 교육은 나에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적 수단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사회에서 한 인간의 생활과 삶의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단 하나의 절대적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러한 교육의 목표가 인간과 사회의 실현과 행복추구보다는 자본과 권력을 향한 개인주의적 욕구로서 인식되어질 때, 과연 그 목표가 어떤 수단도 정당화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 의심하게 했다. 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극히 비자유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히 비교육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 아니 더 나아가 교육의 수단이 스스로 그 교육의 목적을 파괴해 버리는 교육을 우리는 환경(가정, 학교, 사회)으로부터 강요받고 자라게 했다. 즉 우리가 교육을 통해 교육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대학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고등교육은 어떨까? 이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지 기능화 되어버리는 고등교육은 인간소외에까지 이르는 또 다른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가까운 체벌일 수도 있다.
(20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