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 만들기>
영감 서씨 ⓛ"

 

글쓴이 이문근(전북대 전자정보공학부 교수)

약속은
지키자!


 

나에게 우정을 한마디로 정의 하라면? ‘약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 대한 ‘약속’일까? 그건 상대방의 옳음(義)을 믿는(信) 약속, 즉 ‘신의(信義)’에 대한 약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금까지 곧고 바르게 살아온 ‘영감’ 서씨. 서씨의 삶은 우리에게 그런 신의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번 호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서씨와의 만남

서씨를 만난 것은 1976년 3월 초,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3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했다. 그것은 2학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기대였다. 특히 우리반 같은 경우는 우리 담임, 즉 황곤조의 잔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였다.

3학년이 되면서 반이 배정되었다. 배정 원칙은 냉혹한 성적우열의 원칙이었다. 등수에 따라, 1, 2, 3반을 ‘열’반, 4, 5반을 ‘우’반, 즉 ‘특수’반으로 나누었다. 1, 2학년 때 성적의 차이는 고작 훈계나 체벌 정도의 차이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성적의 차이는 구조적으로 우반과 열반이라는 영구적인 ‘벽’을 만들고 말았다. 나아가 성적은 우반에 속하지 않지만 집안의 능력에 따라 우반에 속한 학생들도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우열은 한번 결정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즉 한번 열반으로 배정이 되고나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적이 향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 열반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배정은 많은 학생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우반과 열반의 학생들은 서로 소원해지거나 적대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우반이라고 우쭐대는 학생들, 열반이라고 기가 죽어 다니는 학생들, 우반이라고 우대해 주는 선생들, 열반이라고 열 받게 하는 선생들.

학교에서는 정말 특별하게 우반을 관리했다. 등교, 하교 시간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과목도 각각 전공 선생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우반에는 우수한 선생을, 열반에는 열악하거나 신임 선생이 과목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열반에서는 수학시간에 신임 수학 선생이 육두문자를 써가며, “야! 이 XX들아! 성적이 이게 뭐야! 너희들이 이러니깐 열반에 왔지!” 하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니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즉 공부를 못해서 열반에 왔지만 열반에 와서 더욱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처럼 우익우 열익열 현상을 초래하는 악순환의 환경에서 누가 어떻게 공부를 하겠는가!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 이런 열반에 있었다면 아마도 다른 학생들과 거의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하였든, 나와 나의 단짝 이씨의 가장 큰 기대는 같은 반 친구들의 기대처럼 담임 황곤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우리는 3학년 첫날 운동장에 모여 반 배정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와 이씨는 4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학생들이 모두 배정받은 반에 모여 웅성웅성하며 담임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선생님 오신다!” 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침을 삼키고 있었다. 얼마나 기대되는 순간인가.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은 황곤조가 아닌가! 소수의 학생들이지만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후~’와 ‘아~’를 토해내는 학생들의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렸다. 이내 황곤조가 교단 위에 올라오자 교실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난로도 제대로 피우지 않은, 그리고 겨울의 한기도 아직 가시지 않은, 이 첫날 교실의 분위기는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대부분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이미 황곤조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황곤조는 교탁을 대나무 뿌리로 된 그 특유의 교편으로 ‘탁! 탁!’ 때리며, 자신의 그 특유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첫마디를 열었다. “야~. 야~. 걱정 마라, 걱정 마! 내가 이 반 담임이 아니니까! 담임이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아 내가 며칠만 너희들을 맡게 되었다.” 이러자 여기저기서 “휴~우” 하는 학생들의 안도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나와 옆에 앉아 있던 이씨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무언가 불안한, 아니 불길한 기운을 파악하며, 고개를 거의 책상에 박다시피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황곤조는 다시 교탁을 교편으로 ‘탁! 탁!’ 치며, 나와 이씨를 가리키며, “야! 저 뒤에 이XX, 이YY! 고개 들어!” 하며 작은 눈을 부라렸다. 아, 그때, 종아리로부터 허벅지를 타고 뒷골까지 흐르며 찌릇찌릇 신경계를 바늘로 쑤시듯 자극하는 저 교편의 부딪히는 소리, 두골이 금이 갈 정도로 중이과 잇몸의 신경을 자극하는 저 까랑까랑한 폐부를 뒤트는 목소리, 각막을 통해 시신경을 파고들며 정수리가 떨리도록 대뇌를 후벼 파며 판단력을 흩트려 놓는 저 잔인하고 교활한 눈빛! 아, 하늘님이시여, 제발, 우리의 가장 큰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시를 …. 황곤조가 우리 반을 맡겠다던 며칠은 곧 몇주, 몇달이 되었고, 우리는 담임이 누구인지에 대한 어떤 질문도,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가졌던 우리의 가장 큰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음을, 또 우리에게 2학년 때보다 더 잔인하고 잔악한 또 하나의 1년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한 첫날, 나와 이씨는 다시 짝꿍이 되었고, 내 앞줄 옆쪽에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리고 등하교를 같이 할 정도로 친했던 친구 ‘이동X’(이하 동씨)와 그 옆에 처음 보는 ‘서XX’(이하 서씨)가 있었다. 서씨의 인상은 듬직한 남성형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같았다. 잘 다듬어진 반듯한 얼굴에, 큰 눈, 짙은 눈썹, 바르고 곧은 코, 두툼한 입술, ….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한, 그래서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외모를 가졌었다. 단지 유사점이 있다면 나와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얼굴이 까맣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서씨의 인상은 그가 동씨와 짝꿍을 하면서 얼마나 표면적이었는가를 바로 알게 되었다.

수류탄 사건

동씨는 교동에 사는 친구였다. 얼굴은 귀공자처럼 미남형에 우유빛처럼 하얗다 못해 창백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점심에는 계란, 소고기 자반 및 김 같은 것들을 반찬으로 가지고 다닐 정도의 여유도 있어 보였다. 교복은 항상 정갈하게 다림질이 되어 있었고, 손수건이나 운동복이 편의상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동씨와 짝꿍을 한 서씨는 인물은 준수하지만, 약간은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서먹서먹한 1~2주간을 보내고 둘은 정말 시끄러울 정도로 친해졌다. 중앙초등학교를 나온 동씨와 풍남초등학교를 나온 서씨는 사는 곳도 근처였다. 당시 전여상(구 전여고) 옆 철길 밑 굴다리를 기준으로 동씨는 교동 방면으로 약 2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서씨는 서노송동 방면으로 약 3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 등하교도 매일 같이 할 정도로 찰떡꿍이 되어 갔다. 하지만 그들의 장난과 놀이는 옆에서 보기에도 웃음을 자아내는 그런 장난과 놀이들이었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 일어서서 발표를 하고 난 다음 다시 앉을 때 걸상을 치워, 앉는 순간 바닥에 쓰러지게 하는, 아니면 앉는 순간 걸상 위에 다른 물체를 놓아 순간 엉덩이에 강한 충격을 주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니면, 쉬는 시간에 교실 뒤편에서 김일의 흉내를 내며 레슬링을 하여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양편으로 나뉘어 응원을 하게 하는 놀이들이었다. 하여튼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또 그들처럼 우리들도 서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하며 관심이 가는 친구들과 익숙해져 갔다.

당시 이 지역은 평균화가 되지 않았었다. 특수반도 지역 명문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반이었다. 1점이 당락을 결정하는 당시의 입시전쟁에는, 군사정권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체력장시험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시험은 고입시험 총200점 만점에 20점, 즉 10%를 차지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여기에는 턱걸이, 100m 달리기, 1000m 달리기, 넓이 뛰기, 윗몸 일으키기 등과 함께 (수류탄) 멀리던지기가 있었다. 멀리던지기에서 던져야 할 대상은 안은 쇠로 되어 있고 밖은 고무로 쌓여 있는 수류탄 모형(이하 수류탄)이었다.

체육이나 체력장준비 시간에 이루어지는 연습 중, 이 멀리던지기 연습만은 매우 독특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한 반을 두 진영으로 나누고, 각 진영을 각각 양쪽 축구 골대를 중심으로 좌우 구석으로 길게 한 줄로 서게 한 다음, 신호가 떨어지면 한 쪽 진영에서부터 다른 진영으로 각자 1개의 수류탄을 일시에 하프라인을 넘어 던지게 하고, 이 수류탄이 모든 다른 진영으로 넘어오면 그 진영에게 방금 자신의 진영에 떨어진 수류탄을 각자 하나씩 주어 와서 자신 진영의 원 위치로 복귀한 다음, 신호가 떨어지면 그 수류탄을 상대방 진영에 상대방이 던진 똑같은 방식으로 던지게 했다. 상상해 보라. 한 진영에서 수류탄을 한꺼번에 던지면 공중으로 휙휙 날아가 상대방의 진영에 우수수 떨어져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때굴때굴 구르는 수류탄들, 이 수류탄들이 모두 멈추면 수류탄을 구하러 ‘우~’ 하고 몰려가는 학생들, 그리고 다시 상대방 진영에 날아가 뿌연 모래연기를 일으키는 수류탄들, 다시 잠잠해지면 ‘우~’ 몰려가는 학생들, ….

혹자는 이 연습이 흥미롭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이 연습은 무척 위험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수류탄을 던질 때 각각 체력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수류탄이 떨어지는 거리와 지점이 일정하지 않았다. 수류탄이 진영 앞 멀리서 떨어지면 상관이 없지만, 바로 코앞에서 떨어질 때는 간담이 써늘한 경우가 발생되곤 했다. 특히 수류탄의 구조상 땅에 떨어지고 나면 럭비공처럼 어느 곳으로 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수류탄 피하기 위해 뒤쪽으로 ‘우~’ 흩어지거나 도망가는 상황이 발생되곤 했다. 정말 실제 수류탄이 터지는 것처럼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가. 누군가 그 수류탄에 맞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정말 이런 우려하던 일이 발생되고 말았다.

연습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5월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습 중 한 학생이 던진 수류탄이 상대 학생의 머리에 직접 맞은 것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던진 학생은 서씨였고, 맞은 학생은 동씨였다. 진영을 둘로 나누다 보니 당연히 걸상을 같이 쓰는 짝꿍이 상대 진영에 가는 경우가 많았고, 또 많이 그렇게 했다. 그래서 수류탄을 던지기 전에, “야~, XX야. 수류탄 받아라~!” 하면, 다른 한 쪽에서 “알았다~!” 하는, 정말 놀이에 가까웠던 훈련, 아니 연습이었다. 그런데 서씨가 던질 때 동씨가 해찰을 하다가 이런 변을 당하고 말았다. 동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 서씨는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별 별 소문이 다 났다: ‘동씨가 죽었다’, ‘병신이 되었다’, 그래서 ‘서씨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 며칠 만에 서씨가 학교에 나왔다. 동씨가 있었던 서씨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서씨는 온 종일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서 간단한 자리 배치가 있었고, 서씨의 옆에 새로운 짝궁이 앉게 되었다. 그리고 동씨는 졸업할 때가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던 동씨는 몇달 만에 깨어났고, 학교의 배려로 집에서 개인교습 및 과외를 통해 중3을 무사히(?) 마친 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들었다.)

이 사건 뒤에 변한 것이 있다면, 수류탄을 던질 때 더욱 더 먼 거리에서 던지도록 진영 간의 거리를 축구장 볼대 사이가 아니라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바뀐 것과 서씨의 상태였다.

삼총사

이 사건 이후, 처음 의젓했던, 그리고 동씨와 함께 맑고, 밝고, 명랑했던 서씨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둠의 그늘에 묻혀, 말도, 웃음도, 기운도 없어 보였다. 온 종일 책상에 얼굴만 쳐 박고 있는 서씨. 나와 내 짝꿍 이씨가 이런 서씨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때가 아니었나 싶다. 등하교 때 푹 쳐진 어깨를 끌고 휘청휘청 거리며 걸어가는 서씨의 모습을 보면서, 나와 이씨는 서씨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동무가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다행히 이씨의 집이 서씨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유로 거의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철길, 남천교, 장승백이를 거쳐 옥녀지에 이르는 논길, 산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이런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서씨는 조금씩 처음 보았던 그 의젓함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씨와 같이 지내던 그 밝고 명랑한 모습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봄은 가고 날은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체력장시험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계속되었다. 특히 더운 날씨에 치러야만 하는, 운동장을 계속 빙빙 돌아야 하는 1km 달리기 연습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런데 담임 황곤조는 이 고역(苦役)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고안해서 사역(死役)으로 만들고 말았다. 즉 매주 마라톤을 시켰다. 그것도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게 하고서! 코스는 교문에서 평화초등학교, 장승백이, 그리고 이 지점을 반환점으로 학산 능선을 따라 옥녀지에 이르는 산길, 옥녀지 뚝길, 그리고 운동장이었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이 코스를 한번 돌고 나면, 정말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특히 모래주머니에서 모래가 흘러나와 신발에 들어갈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반면 담임 황곤조는 각 분단을 출발 시켜놓고 난 다음, 그늘에 앉아 각조가 그 코스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곤 했다. 그런데 매주 이 사역을 치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달려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들자, 학교와 장승백이 중간에 옥녀지 앞 우측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산이 있다는 사실, 이 산에 가려 평화초등학교와 장승백이 중간부터는 옥녀지 뚝길 앞쪽에 있는 마을 초입까지는 담임 황곤조가 우리를 관찰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중간 지점으로부터 그 조그만 산으로 직접 가로지르는 논길과 그 산에서 옥녀지 뚝길 앞쪽 마을 입구까지 산길이 나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바로 장승백이를 기점으로 학산 능선을 따라 옥녀지 초입까지 삥 돌 필요가 없이 바로 그 직선 코스를 따라 ‘가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즉행(知卽行), 즉 알면 바로 실천하라, 아니 아는 것을 실천하라. 아니, 담임 황곤조의 학급훈(學級訓) 대로, ‘하라’ 왜냐하면 ‘하면 된다’니깐!

나와 이씨 및 서씨를 포함한 친구들은 분반을 나눌 때 같은 분반에 합류했다 (사실, 아니 같은 분반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리고 ‘헛둘~, 헛둘~’ 외치며 맨 뒤에 달리다가 평화초등학교를 지나 중간의 그 지점에 도착하면 잽싸게 논길과 산길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 마을 초입 근처에서 쉬면서 다른 분반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맨 마지막 분반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마을 입구를 빠져나오곤 했다. 얼굴에 땀이 난 것처럼 시냇물로 씻고 난 다음. 처음엔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쥐죽은 듯 쉬었지만, 서서히 그 단축된 거리가 전체의 1/2에 해당하고 그 시간이 약 15~20분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근처 무덤가에서 온갖 놀이를 하고 놀았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부르면 배삼룡의 개다리춤이나, 이장희의 ‘그건 너’를 부르며 고고춤을 추기도 하고, 씨름이나 대련 및 돌팔매질 등을 하며 놀았다. 그러다가 망을 보던 친구가 “야! 마지막 분반이 온다!” 하면, ‘우~’ 개울물로 가서 얼굴을 적시고 ‘우~’ 마을 입구를 통해 몰려가는 그 모습은 개선부대의 군인들처럼 기세가 당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행동은 우리가 비밀을 지키고 단합하면 황곤조의 폭악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나름의 어떤 희망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놀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하교시 우리는 학교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지만, 대부분 걸어 다니곤 했었다. 그 이유는 학교버스 이용료나 50원 정도하던 시내버스 요금을 아껴 군것질을 하거나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표적인 군것질은 당연 남부시장에 있는 바나나빵이었다. 이 빵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손가락만하게 잘라 기름에 살짝 튀긴, 그러면 정말 바나나 만하게 되는 속이 텅 빈 튀김 빵이었다. 그리고 100원 어치만 시켜도 설탕을 듬뿍 묻혀 큰 쟁반에 정말 하나 가득 담아 주던 빵이었다. 4~5명이 먹을 때마다 설탕을 꼭꼭 찍어 맘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빵을 먹을 때는 꼭 철칙을 하나 준 수 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칭에 관한 통제와 절제였다. 이 빵은 그 모양이나 이름이 ‘XX’과 비슷해 우리는 줄여 간단하게 ‘X빵’이라 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X빵’이라는 말을 절대 꺼내서는 안되었다. 예를 들면, “X빵 100원 어치 주세요” 또는 먹으면서, “야, X빵 먹자” 아니면 “야! X빵 맛있다” 등의 말을 했다가는 어디에선가 순식간에 주인의 쟁반이 머리위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어떤 놈이 X빵이라고 했냐! 당장 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꼭 다짐을 했다. ‘야, X빵이라고 절대 하지마! 알았지?’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얌전히 빵을 먹곤 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인가. 할 말은 꼭 하고 사는 사나이들 아닌가. 돈 계산을 하고 난 다음 밖에 나가서, 우리는 주인아저씨에게 꼭 인사를 했다. “아저씨! X빵 잘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저씨의 “이놈~! 이놈~!” 하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멀리 줄행랑을 치곤 했었다. 하지만 다음에 가면 주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우리를 대해주곤 했었다.

아마도 여름이 지나면서 서씨는 우리와 이런 시간을 통해 조금씩 동씨와 같이 했던 명랑함과 의젓함을 웃음과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이 시기가 수류탄으로 쓰러졌던 동씨가 회복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나와 이씨와 서씨는 이렇게 조금씩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되어 갔다. 하지만 서씨의 명랑함과 웃음 뒤에는 아직도 어두운 그리고 우울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다음 호에는 ‘영감’ 서씨 2부를 계속합니다.)
 
(20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