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계화의 남겨진 과제, 존중과 조화

 

글쓴이 편집부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조승희 사건도 이제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33명의 사상자를 낸 이번 총기난사사건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것에 대해 한국의 언론과 일부 국민들이 과잉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닌지 반성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만큼 4월 16일의 그 사건에 대해 한결 차분한 분위기다. 지나친 민족주의, 극단적인 자책 등등. 이번 사건을 언급할 때면 나오는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조금 더 사건을 넓게 볼만큼 여유를 찾은 이 시점에서 이제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소수자로 남아버린 이민자들의 인권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일만이 우리의 과제로 남은 것은 아닐까?


조승희를 통해서 본 미국 이민의 역사

이문근 (전북대학교 컴퓨터공학 교수)


지난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공대(VT: Virginia Tech)에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학내총기살인사건(이하 VT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총 33(용의자 포함)명이 총상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한국국적을 가진 버지니아공대 4학년생인 22세의 조승희를 지목하였고, 용의자는 사건 직후 자살을 했다고 미국 FBI는 조사결과를 밝혔습니다. 이 사건의 용의자인 조승희는 가족들과 함께 8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사건 당시 미국영주권자였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충격을 주었으며, 용의자의 모국인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들은 몇 주 동안이 사건을 톱뉴스로 다루었습니다. 특히 자살했다고 조사된 용의자의 사건 동기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이유 때문에 실증적인 보도보다는 추측성 보도와 더불어 문제의 본질을 극히 미시적인 용의자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로 비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심지어는 조•중•동과 같은 언론에서는 용의자의 국적이 한국이므로 한국이 미국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상식적’이며 ‘비언론적’인 비굴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일부 웹진에서는 사건에 대한 미흡한 정보와 객관성 결여 때문에 9•11과 같은 4•16 음모론이 제기되었고 아직도 이 음모론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기존의 언론이 다루지 않는 관점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글을 통해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 희망과 절망을 위한 도피

우리 주위에는 가까운 가족 중에 합법•비합법적으로 미국으로 이민 및 유학/정착을 하러 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약 300만 정도의 한국인들이 미국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뉴욕지역 100만명, LA 지역 100만명, 나머지 100만명. 한국사회의 치열한 경쟁구도와 높은 교육열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짧은 기간에 미국사회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높은 경쟁력을 가지며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이민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이유 때문에 미국은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을 허용했을까요? 미국이 조•중•동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를 항상 보살펴주는 ‘Big Brother’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우리 국민들에게 더욱 선진화된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과 미래를 약속하기 위해서 일까요?

미국 이민의 역사는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처음 미국으로의 이민은 동학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의 결말과정에서 발생이 되었습니다. 함경남북도의 항일운동가들이 일본군에 쫓기던 상황에서 값싼 노동력을 구하던 미국의 상인들의 배에 올라탔던 것입니다 - 이 과정에서 미•일간의 정치적인 타협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최저 임금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금했을 뿐만 아니라 미동부 LA에 독립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독립군을 만주에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망한 조선의 왕자라고 속이며 ‘외교독립’을 외치던 이승만에게 이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음 이민은 해방과 전쟁 후 미군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전쟁 후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던, ‘양공주’라는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의 국제결혼과 이민입니다. 이들은 이민 후, 60년대 이후 많은 이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뉴욕, LA, 시카고처럼 한곳에 집중해서 정착을 하지 못했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이민 초기 이들이 정착하는 지역이 이들의 남편이 소속된 부대였기 때문이며, 또한 이들이,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동포사회로부터 ‘양공주’라는 소외 계층이라는 인식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남편의 직급에 따라 이민자들을 서로 차별하는 경우도 발생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패트 킴처럼 가수라는 자신의 신분과 장교라는 남편의 신분을 이유로 다른 에게 이민자를 천대하거나 외면하는 경우도 발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들과 이들을 따라 한국에서 이민을 온 가족들은 주로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한인촌을 형성하며 살아갔습니다.

다음 이민은 아시아계에 대해 이민을 허용한 1963년 이후 전문직종자의 이민입니다. 이 배경에는 한국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더 나은 환경에서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이후 이들과 이들의 가족들이 미국이민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이들은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인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민은 80년 중반 이후 유학을 온 세대들의 이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갔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유학 후 미국에 직장을 잡고 정착을 했습니다.

이외에도 소수이지만 베트남전쟁 이후 용병이나 용역으로 베트남에 있다가 미국으로 간 사람들의 이민도 있습니다. 미국에 기독교 관련 회의나 집회에 참석을 했다가 정착한 목사들의 이민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불법 체류자들이 많습니다. 이 외에도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가 미국으로 오거나, 중남미에 이민을 갔다가 미국으로 오는 한국인들도 많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월남한 사람들 중에 고향인 북한을 가고 싶어 미국에 이민을 온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민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단지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민은 그런 역사가 낳은 필연적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근•현대사에 존재했던, 우리 사회의 불안한 정치•경제•사회•교육적 요인들은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 인종간의 갈등

미국에서의 한국인의 이민을 이런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미국에 입장에서는 한국인의 이민을 미국의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스스로를 ‘melting pot’, 즉 ‘인종•문화의 도가니’로 비유하며 모든 인종, 민족 및 문화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적 또는 지구적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유럽중심, 백인 중심 자본가와 기업가의 문화와 역사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선 미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미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흑인에 대한 노예제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하던 당시 북미에는 약 2000만명의 미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친절했던 원주민들을 유럽인들은 서부까지 개척을 하는 과정에서 이중 90%에 해당하는 1800만명을 전투에서 죽였습니다. 남은 10%는 싸울 힘이 없는 노인과 어린이 뿐이었습니다. 미원주민들은 마지막 최후의 한 사람까지 유럽인들에게 저항을 하며 싸웠던 위대한 민족이었습니다. 미국은 미원주민의 죽음위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는 미국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흑인들은 남북전쟁 때까지 농업의 주요 노동력이었고, 전쟁 이후에는 공업의 주요 노동력이 되었습니다. 즉 미국은 흑인의 노동력에 의해 농업과 공업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방된 흑인들의 의식화와 사회화를 두려워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이들의 노동력과 경쟁 할 수 있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유럽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흑인과 유럽 이민자들 간의 갈등이 조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흑인과 기존의 백인 기득권, 즉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와의 직접적인 갈등과 대립을 부분적으로 완화시켜주는 완충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이민은 세계2차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이렇게 누적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점진적으로 196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흑인의 인권운동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를 들 수 있습니다. 킹은 흑인 입장에서 보수온건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사후 정부와 언론에 의해 흑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지만, 이슬람에 기반을 두고 흑인 운동을 주도하던 X는 미국사회의 위험인물로까지 낙인찍힙니다 - 미국의 이슬람 종교, 국가, 단체에 대한 탄압 및 박해는 이런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이 바로 1963년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이민의 문호를 연 시기입니다. 아시아계에 대한 이민은 과거 유럽에 대한 이민보다 더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아시아 국가의 중•상류층에 해당하는 전문가나 기술자 집단으로 한정을 했습니다. 이전의 유럽인의 이민은 노동력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아시아계에 대한 이민은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그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제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이민자들은 정착 후 전문직이나 기술직에 종사하는 경우보다는 흑인을 상대로 소규모 자영업을 하던 유럽이민자들의 사업영역으로 조금씩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영역이 식품점, 세탁소, 주류점, 편의점, 야채과일점, 잡화점 등 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유발하던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조금씩 지역적인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흑인과 황인의 문제로 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과거 유럽이민자들이 흑인과 WASP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완충제 역할을 했던 것보다 더 충실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완충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꾸준한 증가, 그들의 빠른 경제적인 안정과 토착화, 높은 교육열과 2세들에 대한 투자와 그들의 전문직으로의 진출과 확산 등으로 인해 WASP 중심의 미국 지식기반 사회가 부분적으로 위협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점에서 이런 아시아계와 경쟁 할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이민을 허용해야만 했습니다.

1963년 미국이 아시아계에 문호를 개방한지 한 세대, 즉 30년만인 1990년 초, 미국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 동유럽에서 산재해 있는 수많은 과학자, 지식인 및 전문가들을 위한 이민을 개방했습니다. 구소련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이 서유럽 또는 동북아시아에 유입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아시아계의 고급인력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백인 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미국 이민은 미국의 구조적인 지배논리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 역사의 주체인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그들 간의 직접적인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완충역할을 위한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결과 흑인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희석시킴으로써 미국 사회의 본질적인 구조 모순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며, 셋째는 미국을 추종하는 국가들의 국민들에게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망상으로 그 국가에 대한 자국에서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시아계에 대한 이민은 자국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나아가 국제관계에서 아시아를 문화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 미국의 폭력

어느 사회나 갈등과 대립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사회의 양식과 가치에 따라 그 해결 방법은 다릅니다.

미국에서 대립과 갈등은 일반적으로 폭력을 통해서 해결 되어 왔습니다. 내부적 대립과 갈등은 과거 미원주민, 흑인 및 소수민족에 대한 폭력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외부적인 대립과 갈등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약소국가에 대한 폭력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이 배후에는 자본가와 기업가의 이해관계가 갚게 깔려 있습니다.

이런 폭력의 당연한 결과 또는 그 정당성일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문화는 매우 폭력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면 그 폭력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런 폭력은 역으로 개인간, 집단간, 국가간의 대립과 갈등을 더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더 심화된 대립과 갈등은 더 심각한 폭력을 발생시켰습니다. 즉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대립과 갈등은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낳고,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런 폭력은 미국사회 전체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9•11입니다. 9•11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과 국가에게 어떤 보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영화처럼’ 보여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개인의 권리를 국가안전의 이름으로 침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과거 우리의 국가보안법보다 더 강도가 높은, ‘국토안보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군인과 일반인들이었습니다. 이익을 본 사람들은 자본가와 기업이었습니다. 결국 자본가와 기업가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군인들과 일반인이 희생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등과 대립, 그리고 폭력에 의해, 결과적으로 강자는 이득을 보고 약자는 피해를 본다는 것은 사회에 구조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역으로 강자의 이익을 위해 사회 구조적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조승희의 필연적 우연

미국이라는 국가적, 사회적, 역사적 폭력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가치와 양식에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폭력적일 수 있는 것처럼, 분명 어떤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폭력으로 합법화된 총기 소유를 통해, 개인•가정•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존재할 때, 이 대립과 갈등을, 총기를 사용하는 폭력으로 귀결될 확률은 아주 높을 것입니다. 매년 미국에서, 총기소유가 합법적인 캐나다보다 100배가 높은, 1만1천건 이상의 총기살인사건이 - 이 사건 중 약 40% 이상이 남녀간의 갈등으로 빗어진 사살과 자살 사건이라고 합니다 - 발생하는 것으로 보면 이 확률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VT사건이나 조승희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 학생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적인 구조적 문제 때문에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한국을 떠나, 폭력적인 역사적•사회적 구조를 가진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적 대립과 갈등을 거치면서 교육을 받던 과정에서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해결하기 위해서, 1만1천건 이상의 총기살인사건과 같이,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은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률 안에 조승희가 포함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만약 설명한 바와 같은 필연적 인과성이 없다면 이 책임은 전적으로 조승희 개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조승희라는 개인의 정신적, 가정적, 교육적, 이민적 비정상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설명한 바와 같은 확률적인 필연적 인과성이 있다면 그 원인을 제공한 국가나 사회가 그 책임은 그 확률만큼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미국의 신/자유주의, 폭력화, 양극화, 흑백 대립, 소수민족의 소외, 총기소유합법화, 반사회화, 반복지화 등과 같은 미국의 사회구조적 요인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언론은 VT사건와 조승희 문제를 이런 필연적 관계 보다는 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조명을 했습니다. 특히 조•중•동과 같은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정부가 사과를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Big Brother’에게 과잉 충성을 은근히 조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문제의 필연성뿐만이 아니라, 우연성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과잉충성’이라는 맹목성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한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마저도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잉충성을 위해 정부와 대통령, 심지어는 국민들에게까지 굴종과 비굴을 강요하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반민중적, 반민주적 행위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2007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