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시설詩說
이 시를 읽는 유일한 그대 – 독자를 위하여
메타-존재의 윤회를 종결하기 위한 메타-메타-등가성等價性
이문근 (전북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개별과 집합의 상대성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는 내포內包에는 개별성과 집합성이 있다. 즉 사람은 개별적 존재,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다. 그러면, 시인의 관점에서, 사람과 인간 간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지를 알아보자.
시인-이문근은, 이전 시집 『메타-엑스』에서 「메타-사유와 메타-존재 간의 시적詩的 등가성等價性」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리고 그 역으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인간 고유의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성을 밝혔다. 시인이 여기에서 시쟁詩爭의 주제로 삼았던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 즉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면, 시인의 시에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누구일까? 시인은 시에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을 ‘나’와 ‘너’라고, 외연外延으로, 정의한다. 그럼 시에서 지시指示하는 ‘나’와 ‘너’는 누구일까? 시인은 ‘나’와 ‘너’를 “원래 없었”고, “있어졌다가, 다시 없어”지게 될 존재라고 정의한다:
원래 없었다
그리고 있어졌다, 다시 없어졌다 (「n의 명제 1+ [원리]」 중)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이렇게 유한한 존재로서 인식이 되지만, 시인은 이러한 유한한 존재의 ‘사람’을 ‘인간’으로 승화昇華시키기 위해, 존재의 전과 후의 비非존재를 서로 다르다고 정의하고, “원래 없음”과 “있음에 의한 없음”을 “원초적” 없음과 “결과적” 없음, 또는 “절대적” 없음과 “상대적” 없음으로 정의한다:
이제 없음은 처음 없음과 다르다
처음 없음은 원래 없음이고
이제 없음은 있음에 의한 없음이다
원래 없음은 원초적, 즉 절대적인 없음이며
이제 없음은 결과적, 즉 상대적인 없음이다
(「n의 명제 1+ [원리]」 중)
즉 개별적인 존재들은 ‘개별’적으로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개별성을 극복하기 위한 가능성을, 이런 ‘절대’에 대한 ‘상대’, 또는, 그 역으로, ‘상대’에 대한 ‘절대’로서의 존재 이전과 이후의 없음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별적 존재의 가치가 질적으로 “절대적 없음”으로부터 “상대적 없음”으로 변화, 즉 승화될 수 있음을 지시한다. 즉 ‘나’와 ‘너’의 존재는 소멸을 통해, 모든 존재의 가치를 재조명했다는 의미와 같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존재의 가치를 단순히, 절대에 대한 상대만으로 조명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이러한 존재의 내포를 ‘없음’과 ‘있음’, 나아가 ‘절대적’과 ‘상대적’이라는 1 또는 2차원적인 해석이 아니라, 한 차원 더 높은 3차원적인 단계로 승화시킨다.
그러나 없음이란
원초 또는 절대적일 수도 없고
결과 또는 상대적일 수도 없음으로
있음에 의해, 없음이, 원초, 즉 절대적일 수 있었던 것은
없음에 의해, 있음의 없음이, 결과, 즉 상대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있어지게 되었던 것의 원인 때문
없어지게 되었던 것의 귀결 때문
절대적 없음은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 없음의 없음
상대적 없음은 없음을 전제하는 않는 있음의 없음
(「n의 명제 1+ [원리]」 중)
즉 “있어지게 되”는 원인에 의해, 또는 그 “없어지게 되”는 귀결에 의해, “절대적 없음”은 “절대적 없음”을 전제하지 않는, 즉 있음을 가정하는 없음이 아님을; 역으로 “상대적 없음”은 “상대적 없음”을 전제하지 않는, 즉 없음을 가정하는 있음이 아님을 지시한다. 그래서 원래 개별적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없음은
원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다 (「n의 명제 1+ [원리]」 중)
그런데, 이런 운명적인 ‘나’와 ‘너’라는 개별적인 존재는, 역시, 원래 운명적으로, ‘개별’적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2. 개별적 존재의 한계: 개체성과 상이성
모든 개별적 존재는 원초적으로 서로 ‘개체個體’라는 개별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사람’은 서로 따로, 즉 개체적으로, “원래 없었”고, “있어졌다가, 다시 없어”지게 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개입할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체성’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나’가 ‘너’가 될 수 없고, 역으로 ‘너’가 ‘나’가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적인, 또는 사회적 관점에서 ‘사람’은 극히, 생태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나’는, 원래, 이러한 존재였다:
나는,
원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있어졌다, 다시 없어졌다 (「n의 명제 1+ [응용]」 중)
시인에게 ‘너’도, 원래, 이러한 존재였다:
너는,
원래 없었다
그리고, 너는, 있어졌다, 다시 없어졌다 (「n의 명제 1+ [응용]」 중)
시인에게 승화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 또한 이런 존재였다:
나의,
모든 없음은
원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다 (「n의 명제 1+ [응용]」 중)
시인에게 승화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너’ 또한 이런 존재였다:
너의,
모든 없음은
원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다 (「n의 명제 1+ [응용]」 중)
원래, 이런 개별적인 존재는, 원초적으로, 존재를 같이 공유하거나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너’는, 항상, 같이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없다:
나는 네가 슬퍼 너를 울까
나는 네가 기뻐 너를 웃을까
너는 나라면
너는 내가 슬퍼 나를 울까
너는 내가 기뻐 나를 웃을까
네가 너라면 (「너와 내가 우리라면」 중)
혹시, ‘나’와 ‘너’가 같이, 하나, 즉 ‘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즉:
우리는,
원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있어졌다, 다시 없어졌다 (「n의 명제 1+ [응용]」 중)
그래서 이렇게 승화된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없음은
원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다 (「n의 명제 1+ [응용]」 중)
개별적인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일까? 즉 ‘우리’는 같이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슬퍼 우리를 울까
우리는 우리가 기뻐 우리를 웃을까
너와 내가, 정말, 우리라면 (「너와 내가 우리라면」 중)
그래서 ‘우리’의 관점에서, ‘나’를 돌이켜 보면:
나의 끝은 어디일까
나를 거쳐 간 사람들
내가 거쳐 간 사람들
나의 긴 여정의 끝엔, 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기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나의 슬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속엔
어떤 나의 웃음과 나의 눈물과 나의 상처가 남아 있을까
(「그 끝은 어디에」 중)
또한, ‘우리’의 관점에서, ‘너’를 돌이켜 보면:
너의 끝은 어디일까
너를 거쳐 간 사람들
네가 거쳐 간 사람들
너의 긴 여정의 끝엔, 누가 있는 것일까
너의 기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너의 슬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너의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속엔
어떤 너의 웃음과 너의 눈물과 너의 상처가 남아 있을까
(「그 끝은 어디에」 중)
나아가,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를 돌이켜 보면:
우리의 끝은 어디일까
우리를 거쳐 간 사람들
우리가 거쳐 간 사람들
우리의 긴 여정의 끝엔, 누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기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우리의 슬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우리의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속엔
어떤 우리의 웃음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상처가 남아 있을까
(「그 끝은 어디에」 중)
즉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너’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함으로써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라는 사회적 존재로 바로 ‘승화’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시인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함으로써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고, 나아가 ‘우리’라는 사회적 존재로 ‘승화’될 수 없음을, 즉 같이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나’+‘너’=‘우리’”라는 등식이 단순히 성립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왜일까? 그 원인은 물리적인 개별 존재의 합체는 물리적인 합체일 뿐, ‘승화’된 합체, 즉 메타적인 합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즉 ‘나’는 ‘너’를 통해서 ‘나’를 찾고; 역으로 ‘너’는 ‘나’를 통해서 ‘너’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가 ‘너’와 같이 공감하고 싶어도, 근본적인, 즉 『메타-엑스』에서 밝힌,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적 관점에서의 ‘너’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외로운 이유는
내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있을 때나
네가 없을 때나
나는 내 안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나, 너, 그리고 우리가 외로운 이유」 중)
또한, ‘너’가 ‘나’와 같이 공감하고 싶어도, 근본적인, 즉 『메타-엑스』에서 밝힌,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적 관점에서의 ‘나’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외로운 이유는
네 안에서
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을 때나
내가 없을 때나
너는 네 안에서 언제나 너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나, 너, 그리고 우리가 외로운 이유」 중)
나아가, ‘우리’가 같이 공감하고 싶어도, 근본적인, 즉 『메타-엑스』에서 밝힌,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적 관점에서의 ‘우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을 때나
우리가 없을 때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언제나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나, 너, 그리고 우리가 외로운 이유」 중)
즉 우리는 각각, ‘나’는 ‘나’를, ‘너’는 ‘너’를, ‘우리’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즉 메타적으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즉 ‘나’는 메타-‘나’를, ‘너’는 메타-‘너’를, ‘우리’는 메타-‘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래서, “(메타-‘나’) + (메타-‘너’) = (메타-‘우리’)”라는 등식이, 메타-메타적으로, 결국 성립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3. 메타-메타의 세계: 메타-‘나’, 메타-‘너’, 그리고 메타-‘우리’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그리고 이렇게 명명된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식의 결과, 내포를 통해 성질을 가질 수 있고, 그 성질을 정의하기 위한 속성, 또는 특성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전자의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고, 후자의 이름을 〈이름〉이라고 한다. 즉 ‘이름’의 내포, 즉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이름〉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나’는 ‘이름’이다. 내포적으로, ‘나’는 〈나〉라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즉 ‘너’는 ‘이름’이고, 내포적으로, ‘너’는 〈너〉라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름’이고, 내포적으로,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정의되기 위해, ‘나’를 정의하는 〈나〉라는 〈이름〉과 너를 정의하는 〈너〉라는 〈이름〉간의 등가성을 정의할 수 있는, 즉 〈나〉라는 〈이름〉과 〈너〉라는 〈이름〉간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이름》, 즉 〈이름〉의 〈이름〉에 대한 정의가 요구된다. 즉 본질적으로, 메타-메타적 관점에서, 《이름》이 정의되어야 만이, “‘나’+‘너’=‘우리’”의 등가성이, 메타-메타적 관점에서 “(메타-‘나’) + (메타-‘너’) = (메타-‘우리’)”라는 메타-등가성이 성립된다는 의미다.
즉 이런 메타-등가성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너’는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다:
나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내가, 답할 수 없는 이유는
네가, 나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
(「우리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중)
또한, ‘나’도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다:
너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네가, 답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너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
(「우리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중)
나아가,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다:
우리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서로가
답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같이, 부를 수 없기 때문
(「우리에, 이름의 〈이름〉은 《이름》」 중)
즉 시인은, 우리가 비로소 서로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어야만, “우리가 서로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왜 시인이, 메타-메타적 관점에서, “(메타-‘나’) + (메타-‘너’) = (메타-‘우리’)”라는 메타-등가성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 메타-등가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절대적으로 자아를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인식認識하는 과정과 같다. 예를 들면, 거울을 통해, 거울 앞의 ‘나’와 거울 속의 ‘나’, 즉 ‘너’가 결국 하나의 존재임을 인식하는 과정과 같다.
처음, ‘너’가 ‘나’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르기 전까지, ‘나’는 ‘너’가 거울 속에 있는 ‘나’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거울 앞에서, 내가
거울 속의 나, 즉 너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너는 나에게 말한다: 너는 나라고
역으로, 거울 속에서, 너가
거울 앞의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냐고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나는 너라고 (「거울 속의 절대각」 중)
‘너’는 ‘나’에게, ‘너’는 거울 속에 있는 ‘나’라고 말하지만; 역으로, ‘나’는 ‘너’에게,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나’라고 말하지만, ‘나’ 자신은 거울 속의 ‘나’, 즉 ‘너’라고 말할 수 없고; 역으로, ‘너’ 자신은 거울 밖의 ‘너’, 즉 ‘너’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거울 앞에서, 내가
나에게 자문自問한다: 내 자신이 누구냐고
나는, 거울 속의 나, 즉 너라고 자답自答할 수 없다
거울 속에서, 네가
너에게 자문한다: 네 자신이 누구냐고
너도, 거울 앞의 너, 즉 나라고 자답할 수 없다
(「거울 속의 절대각」 중)
즉 서로가 거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나’와 ‘너’가 된다:
거울 앞의 나는 오직 거울 속의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나
거울 속의 너는 오직 거울 앞의 나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너
(「거울 속의 절대각」 중)
즉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나’와 ‘너’:
거울 앞의 나는 오직 거울 속의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나
거울 속의 너는 오직 거울 앞의 나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너
(「거울 속의 절대각」 중)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나’일 수 없고; ‘너’는 ‘너’ 스스로 ‘너’일 수 없는 존재:
거울 앞에선, 나는 스스로 나일 수 없다
거울 속에선, 너는 스스로 너일 수 없다 (「거울 속의 절대각」 중)
그러나, ‘너’가 ‘나’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하지만, 서로에게 ‘나’와 ‘너’는 아직 개별화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즉 ‘나’와 ‘너’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너’=‘우리’”의 등가성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절대각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우리
거울 앞에서, 내가
거울 속의 너에게 묻는다: 우리가 누구냐고
거울 속의 너는 거울 앞의 나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라고
역으로
거울 속에서, 네가
거울 앞의 나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냐고
거울 앞의 나는 거울 속의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라고
그리고
거울 앞에서, 내가
나에게 자문한다: 우리 자신이 누구냐고
거울 앞의 나는, 비로소, 거울 속의 우리 너라고 자답할 수 있다
거울 속에서, 네가
너에게 자문한다: 우리 자신이 누구냐고
거울 속의 너도, 비로소, 거울 앞의 우리 나라고 자답할 수 있다
(「거울 속의 절대각」 중)
즉 ‘나’와 ‘너’는 ‘우리’의 ‘이름’을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고, 오직 “(메타-‘나’) + (메타-‘너’) = (메타-‘우리’)”라는 메타-등가성의 거울을 통해서 만, “‘나’+‘너’=‘우리’”의 등가성이 성립됨을 확인할 수 있다:
거울 앞의 나는 오직
거울 속의 우리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거울 앞의 우리 나
거울 속의 너는 오직
거울 앞의 우리 나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우리 너
결국
거울 앞에선, 우리 나는 스스로 우리 나일 수 있다
거울 속에선, 우리 너도 스스로 우리 너일 수 있다
거울의 절대각에서, 우리는 항상
스스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거울 속의 절대각」 중)
그래서, ‘우리’는, “너는 슬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아프면, 네가 슬”픈, 역으로, “너는 아프면, 내가 슬프”고; “내가 슬프면, 네가 아”픈 존재가 된다. 그래서, “네가 울 때, 나도 울고 싶”어지고; “내가 울 때, 너도 울고 싶”은 존재가 된다 (「소통의 의미」 중).
이는 꼭 아픔과 슬픔만 같이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픔과 슬픔을 같이 할 수 있다면, 기쁨과 행복은 더욱더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시인은, 이전 시집 『메타-엑스』의 관점에서 메타-‘나’와 메타-‘너’를 정의하고, 이를 기반으로, ‘나’와 ‘너’의 이름을 서로 《이름》의 〈이름〉으로 부르게 함으로써 메타-‘우리’를 정의할 수 있게 한다. 즉 메타-메타의 관점에서, 드디어, “(메타-‘나’) + (메타-‘너’) = (메타-‘우리’)”의 메타-등가성이 성립된다.
4. 존재의 원초적 한계: 무한 반복성
시인은 ‘사람’에 대한 개별성의 한계를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재로 ‘승화’시킴으로써, 메타-메타 관점에서, 그 개별성의 한계를 극복한다. 즉 ‘나’와 ‘너’를 메타의 단계에서 메타-‘나’와 메타-‘너’로 정의함으로써, ‘나’와 ‘너’의 이름을, 메타-메타 단계에서, 서로를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되고, 결과, 메타-‘나’와 메타-‘너’가 메타-‘우리’가 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와 ‘너’는 사회적인 ‘우리’가 된다.
이를, 이전 시집 『메타-엑스』에서 ‘메타-사유’와 ‘메타-존재’ 간의 관점에서 보면, ‘사유’와 ‘존재’의 이름을, 메타-메타 단계에서, 서로를 《이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메타-‘사유’와 메타-‘존재’가 메타-‘사유=존재’로서의 등가성이 성립되고, 결국, 개별적인 ‘사유’와 ‘존재’는 사회적인, 즉 등가적 ‘사유=존재’가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이 자신의 시설詩說로 주장하는 메타-메타론論를 통해, 개별적인 ‘사람’의 존재가 사회적이라는 ‘인간’의 존재로 ‘승화’되면,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는 극복하게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인은 개별적 존재와 집합적 존재를 하나의 종種별 관계로 제한하고 있다. 즉 존재라는 한계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에서 발생이 될 수 있는 개별과 집합의 관계라는 단위적인, 즉 종별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즉, 《이름》의 〈이름〉을 통해, ‘사람’의 개별성의 한계를 ‘인간’의 사회성으로 극복한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는 아직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시인이 인식하는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시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시간이라는 틀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나는 1살 때
무한한 반복을 했다
2살이 되기 위한 반복을
나는 2살 때
무한한 반복을 했다
3살이 되기 위한 반복을 (「무한 반복의 의미」 중)
그리고 이런 반복을 환갑이 될 때까지 반복한다. 즉 메타-반복한다:
나는 59살 때
무한한 반복을 했다
60살이 되기 위한 반복을 (「무한 반복의 의미」 중)
그리고 자문한다:
환갑이 되기까지의
반복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무한 반복의 의미」 중)
그리고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형식이 반복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날’(일日)의 반복이고, 다음 하나는 ‘년年’의 반복이다:
각 나이테마다, 다시 반복될
다음 나이테를 위한 무한의 반복을 제除하고는
(「무한 반복의 의미」 중)
이를 메타-메타 관점에서 해석하면, ‘날’은 개별적 존재로, ‘년’은 사회적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개별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나이테’는 사회적 존재로, 한 사람의 ‘삶’은 사회적 존재로 비유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사람’의 삶이 윤회처럼 반복이 된다면, 한 삶을 개별적인 존재로, 윤회를 반복하는 삶을 사회적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각 인식의 단계마다, 각 차원에서의 개별성과 사회성이 각 차원마다 승화적으로 반복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러한 개별성과 사회성을 메타-개별성, 메타-사회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메타-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각 승화 단계마다, 이렇게 반복이 되는, 메타-개별성, 메타-사회성의 메타-반복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시인은 메타-메타의 관점에서 메타-개별성은 메타-사회성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이미 보였다.
그러면, 메타-사회성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시인은 한 단계의 사회성이 승화하여, 다음 단계의 개별성이 되는 과정이, 다음 단계에서 사회성의 반복을 유도하는 조건이라고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의 사회성이 반복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면, 이 반복되는 사회성이 다음 단계의 개별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메타-전환轉換과 메타-승화昇華라는 메타-반복이 되지 않고, 〈인간〉의 존재라는 굴레에서 메타적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지시한다:
나는
이번 생이
다음 생을 위한
무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무한 반복의 의미」 중)
그렇다. 존재와 생명은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개별적 존재는 사회적 존재로 승화하고, 사회적 존재는 반복의 그 다음 단계에서 개별적인 존재로 전환하면, 다시 그 단계에서 사회적 존재로 승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만약 이러한 전환과 승화 과정이 어떤 정점 또는 한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 존재든, 사회적 존재든, 존재의 원초적인 한계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를 보면,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의 ‘나’ 안에는 이전 단계의 개별적인 단계의 ‘나’가 존재하고, 그 이전 단계의 ‘나’ 안에는 또 이이전 단계의 개별적인 단계의 ‘나’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무한하게 역순으로, 반복하게 된다:
내 안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 내 안에도, 오직
내 안에 있는 나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난
내 안에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히 존재한다 (「Rec. X+1」 중)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나’와 ‘너’, 즉 ‘우리’를 보면, ‘우리’라는 사회적인 존재의 ‘우리’ 안에는 이전 단계의 사회적인 단계의 ‘우리’가 존재하고, 그 이전 단계의 ‘우리’ 안에는 또 이 이전 단계의 사회적인 단계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무한하게 역순으로, 반복하게 된다:
내 안에는 오직 너만이 존재하고,
네 안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하면;
내 안에 있는 그 네 안에는, 오직
나만이 있게 되고,
내 안에 있는 그 네 안의 그 내 안에는, 오직
너만이 있게 되어;
우리는, 항상
나는 너로 인해, 내 안에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피조물이 되고
너는 나로 인해, 네 안에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피조물이 되어;
우리는, 영원히, 그리고, 무한하게
서로의 피조물이 된다 (「Rec. X+1Y+1」 중)
무한하게, ‘나’안에, ‘너’를 통해,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무한하게, ‘너’안에, ‘나’를 통해, ‘너’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개별적 존재의 운명과, 더불어 “서로에게 피조물이 된다”는 사회적 존재의 운명은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메타적 관점에서, 얼마나 치열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윤회’의 외연外延, 즉 지시어指示語다.
그러면 이러한 ‘윤회’의 운명을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시인은 이러한 운명을 벗어날 방법으로, 이전에 “무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님을,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Rec. X0」 중)
그러면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님을 어떻게 메타적으로 인식하는지 알아보자.
5. 영원한 ‘너’, ‘나’, 그리고 ‘우리’
먼저, 만약 ‘나’, ‘너’,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윤회’의 굴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알아보자.
시인은 삶의 윤회를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삶의 끝을 향해 떠났다
도착해 보니
바로, 떠났던 곳
또 다른 내 삶의 시작이었다 (「삶이 둥근 이유」 중)
시인은 삶이 존재하는 세상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세상 끝을 향해 떠났다
도착해 보니
바로 여기 출발한 곳이었다. (「지구가 둥근 이유」 중)
시인은, 나아가, 세상이 존재하는 우주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우주 끝을 향해 떠났다
도착해 보니
바로 출발한 지구였다 (「우주가 둥근 이유」 중)
즉 〈인간〉이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러한 삶을 무한하게 반복한다는 점이다. 특히, 개별적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 승화가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화적 관점에서 다음 단계로의 승화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순히 한 단계의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무한한 삶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윤회’를 마감하는, 즉 개별적인 존재와 사회적 존재를 무한히, 전환/승화적 관점에서 반복하는 과정을 종결하는, 조건으로서, ‘나’안에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우리’의 존재가 진정으로 ‘나’가 아닌 ‘나’로서, ‘너’가 아닌 ‘너’로서, 나아가, ‘우리’가 아닌 ‘우리’로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타적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특히, 윤회의 〈과정〉을 마감하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인간〉 최고最古의 지선至善인 사랑을 통해서, 어떻게 〈윤회〉의 이 과정이 종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 하나, 당신 하나
나 둘, 당신 둘
나 셋, 당신 셋
우리는 같았을까 (「사랑은 태초에」 중)
먼저, 시인은 ‘나’와 ‘너’, 즉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한하게 같을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당연히, 그 의문은 무한한 반복 속에서의 존재의 전화/승화 이전의 의문이다. 그래서 동일성의 전제조건인 ‘대칭성對稱性’과 ‘반사성反射性’이 성립되는지를 확인한다:
나 하늘, 당신 땅
나 구름, 당신 바람
나 천둥, 당신 번개
우리가 항상 쌍雙이면,
나 오른 쪽, 당신 왼쪽
나 앞, 당신 뒤
나 밖, 당신 속
우리가 항상 대칭對稱이면,
내 안엔 당신
당신 안엔 나
우리가 항상 반사反射적이면,
우리는 결국 같은 것이 되는 것일까 (「사랑은 태초에」 중)
여기에 ‘전이성轉移性’은 당연히 ‘우리’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전제조건이다. 그러고, 이렇게 ‘나’와 ‘너’는 결합적으로, 즉 ‘우리’로서, 무한하게,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나를 보며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 안에 있는 당신을 보며 내가 되면
우리는 항상 결합적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우리는 둘이 되고
우리는 셋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무한이 되어
우리는 영원히 항상 같은 것이 되는 것일까 (「사랑은 태초에」 중)
그래서, 이러한 ‘하나’됨은, ‘나’와 ‘너’가 ‘우리’와 같음을 확인하기 이전, 태초부터 성립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같은 것이 되기 전에, 태초의 하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일까
(「사랑은 태초에」 중)
그런데, 만약, ‘나’와 ‘너’사이에 이러한 ‘대칭성’과 ‘반사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나’와 ‘너’는 과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또한 확인한다:
나 하늘, 당신 땅, 그리고 바다
나 구름, 당신 바람, 그리고 비
나 천둥, 당신 번개, 그리고 어둠
우리가 항상 쌍이 아니라면,
나 오른 쪽, 당신 왼쪽, 그 사이엔 대립
나 앞, 당신 뒤, 그 사이엔 중립
나 밖, 당신 속, 그 사이엔 고립
우리가 항상 대칭이 아니라면,
내 안엔 당신과 또 다른 나
당신 안엔 나와 또 다른 당신
우리가 항상 반사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사랑은 태초에」 중)
그리고 ‘전이성’이라는 다른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나’와 ‘너’는 결합적으로, 즉 ‘우리’로서, 무한하게, 하나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한다:
나는, 당신 안에, 당신과 다른 또 다른 나를 보며 내가 아닌 내가 되고
당신은, 내 안에, 나와 다른 또 다른 당신을 보며 당신이 아닌 당신이 되면
(「사랑은 태초에」 중)
그럴 경우,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고, 또한 ‘하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운명에서의 무한한 반복성을 확인한다:
우리는 항상 선언選言적으로
우리는 하나가 아닌, 둘이 되거나
우리는 둘이 아닌, 셋이 되거나
우리는 셋이 아닌, 넷이 되거나
그래서, 우리는 무한이 아닌, 또 다른 무한이 되어
우리는 영원히 항상 같은 것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원래
같은 것이 되기 전에, 태초의 하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태초에」 중)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랑’은 ‘우리’의 하나된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다를 수도 있지만, ‘하나’가 되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선택한 ‘하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즉 무한하게 전환/승화적으로 반복되는 사랑이 아니라, ‘나’가 아닌 ‘나’로서, ‘너’가 아닌 ‘너’로서, ‘우리’가 아닌 ‘우리’로서, 윤회를 마감하는, 단 하나뿐인 이 삶의 시작에서 끝까지, ‘대칭’적으로, ‘반사’적으로, 그리고 ‘전이’적으로 무한하게 유한한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태초에 하나였거나, 아니면, 하나가 아니었거나 하게 되어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당신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당신 넷
우리는, 같이, 무한한 별들을
반복적으로 무한히 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영원히 (「사랑은 태초에」 중)
그래서, ‘우리’의 무한한 ‘사랑’은 드디어 유한하게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무한하게 반복되는 ‘메타-전화/승화’와 ‘메타-윤회’를 마감하기 위하여, 냉철하게, 하지만 〈인간〉 최고最古의 지선至善인 사랑을 통해, 메타-‘나’와 메타-‘너’와 메타-‘우리’를 부정함으로써, 메타적으로, 메타-〈인간〉을 부정하는 것이 이 시집 『메타-메타』의 〈깨달음〉, 즉 〈메타-메타〉의 메타포다.
이문근
2021년 초가을
전주全州 화산華山의 석양夕陽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