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의 경제학: “평생지도교수제”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이문근 교수
지난 「담론 1⌟에서,
“캐치프레이즈의 정치학”을
언어라는, 단어의 내포와 외연의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이를 교육적 관점에서 해 보면:
일반적으로,
단어의 내포를 형이상학적 개념,
단어의 외연을 형이하학적인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성주의적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개념과 형이하학적 대상이 적합하게 일치할 때
가장 효율적인 인지적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재해석을,
논리적 관점에서는,
교육적 “일관성” 또는 “타당성”이라 해석해도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역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형이하학적인 대상으로 입증되거나,
역으로, 귀납적으로,
형이하학적인 대상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추상화된다면,
이는,
교육적 관점에서,
피교육자의 지식이,
관념과 실체가 하나로 융합된,
인식이라는,
지식의 “건전성”을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담론 1⌟에서 거론한,
“캐치프레이즈의 정치학”의 실체로서,
“평생지도교수제”를 중심으로,
제도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으로 고찰해 보자.
1. “평생지도교수제”
“평생지도교수제”는, 2007년,
“2020년 세계 100대 대학”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반영한
서거석 총장의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다.
(https://english.jbnu.ac.kr/english/3103/subview.do)
그리고 이 제도는, 이후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반영한
이남호 총장이 승계-확대한,
이전 서거석 총장의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이후
“The Best Glocal University”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반영한,
김동원 총장이 재승계-재확대한,
이전 이남호 총장이 승계-확대했던,
이전전 서거석 총장의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는
기존의 “비정형적인” “지도교수제”를,
“평생지도교수제”라는 제도로,
2007년, 1차, 학생의 졸업요건으로,
2021년, 2차, 교수의 강의시수로 “정형화”한 제도이다.
그럼, 먼저, 이 “평생지도교수제”의 의미를 알아 보자.
2. “평생”이라는 “지도교수제”
이전 담론에서 논한 바와 같이,
언명의 진위는
논증의 건전성에 있다.
즉,
진위성이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참인
타당한 추론 형식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의미다.
이런 진위성의 관점에서,
“평생지도교수제”의 의미를,
형이하학적인 실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평생지도교수제”의 언어적 함의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평생지도교수제”의 대상이 누구인지 규정해 보자.
먼저, 대상이 학생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학생이 “평생”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참일 수 없다.
다음은, 대상이 교수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교수가 “평생” 학교에 근무한다는 것 또한 참일 수 없다.
그럼, 그 대상을, 지도의 관점에서, 따져보자.
그럼 지도의 주체는 교수이고,
그럼 지도의 대상은 학생이 된다.
그럼, 이런 관점에, 즉
교수가 “평생” 학교에 근무하는 조건과 (또는),
학생이 “평생” 학교를 다니는 조건에서,
“평생”, 교수는 지도하고;
“평생”, 학생이 지도를 받는 것은 결코 참일 수 없다.
즉,
주어진 시간 내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지도교수 관계라는 조건에서는,
절대,
“평생지도교수”라는 “제도”는 참일 수 없다.
그리고, 그 부당의 근거는,
이미 참조한 문건 내의 “평생지도교수제”의 목적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학업, 진로, 취업 등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사항을 지도하는
학생 교수 연계 시스템을 구축한다.
즉 “입학에서 졸업까지”라고.
나아가,
“평생지도교수제”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일반 “지도교수”의 의미와 확연히 구분되는,
지시적 단어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는,
이미 고착화된 규범적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며,
또는
준정의적 정의를 수반하는 것도 아니며,
최악의 경우,
새로운 언어적 정의가 한 것도 아니라면,
여기, 즉 “평생지도교수제”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의 의도를 반영된,
경제적인 의도가 내재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3. 교수의 자질
우선,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이행되기 위해서, 교수의 지도 능력이 필수적이다.
즉,
이 제도의 목적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교수는,
학생들의 “학업, 진로, 취업 등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사항을 지도”할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교수들이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일까?
교수들이 대학에 부임하는 연령층은 일반적으로 30대 초반 또는 중반이다.
이런 연령층의 교수들은,
일반적으로, 직장 경력이 일천하다.
직장 경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초급 연구직이거나,
고위 간부가 아닌, 지급이 낮은 사무직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과거에, 이공계의 경우는
병역특례로, 군대를 면제받은 경우도 있어,
대학에 20대 후반에 부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부임 이후 대학에서의 생활도
주로 형이상학적인 교육과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나아가, 교수들이 수행하는 교육과 연구가 얼마나 현실적인지 거의 검증된 바도 없다.
결국,
이러한 경력과 환경의 결과,
교수들은,
사회성과 현실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학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부생의 전공보다는,
자신의 전문 세부 전공과
그 전공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
논문을 작성하는 방법 등과
대학원 생활과 연구 및 과제 수행하는 방법에 더 전문화되어 있다.
지도하는 학부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능성이 없다면
특별히 지도할 만한 사안이 없다고 보면 된다.
결국,
“진로”와 “취업”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교수들이, 현실적으로,
학생들을 얼마나 지도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 든다.
“학업”과 “진로” 및 “취업”을 “전문적”으로 당담하는
검증된 전문가들을 고용하거나,
특수 전문 기관들을 설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일들을, 모두, 교수들에게 전담시키는 것은,
제도는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위한 것이고,
나아가,
형이하학적인 관점에서,
제도의 내용적인 면에서 부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비교육적인 결과를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실체는 없으나, 겉으로는,
교수들은 학생들의 “학업”과 “진로” 및 “취업”을 지도했다는
정량화된 지도 수치에 만족하고;
역으로,
학생들은, 이러한 교수로부터,
“학업”과 “진로” 및 “취업” 지도를 받았다는
지도 수치와 비례한 정형화된 피지도 수치에 만족해야 하는,
제도를 위한 제도,
즉 「진로개발 및 상담⌟일 뿐이다.
그것도,
“평생”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된,
학생에게는 졸업요건으로,
교수에게는 강의시수로 “정형화”한 「진로개발 및 상담⌟일 뿐이다.
(사실, 학업과 진로 및 취업에 대해서는,
국외 우수대학의 사례를 들어,
또 다른 담론에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4. 제도의 부당성
우리 대학에는
1000명 이상의 교수와
25000명 이상의 학부학생과
450명 이상의 직원이 있는 지역의 거점대학이다.
이런 대학에서
25000명 이상의 학부학생의
“학업”과 “진로” 및 “취업”을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평생지도교수제”의 「진로개발 및 상담⌟ 과목을 개설한다고 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을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못 이룰 일들이 없을 것이다.
특히, 학기초와 학기말에,
1000명 이상의 교수와
25000명 이상의 학부학생과
450명 이상의 직원들이,
“평생지도교수제”의 「진로개발 및 상담⌟과목으로 부산한 대학을 보면서:
이 많은 교수와 학생들 및 직원들이
무엇을 위해서
이 많은 총량의 시간과 노력과 재원을 들이면서
제도의 집단적 “퇴행”에 허덕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도,
“세계 100대 대학”,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The Best Glocal University” 이라는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위한 제도의 집단적 “퇴행”에.
혹시, 만에 하나,
이러한 제도에 의해서 산출된
교수들의 지도수치와
학생들의 피지도수치를 기준으로
「진로개발 및 상담⌟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영향도를
객관적인 평가 기준에 따른
정량적 또는 정성적인 수치로 유의미화 한 바가 있다면 모를까.
나아가, 제도의 지도 방법과 내용이
학생의 “학업”과 “진로” 및 “취업”의 결과로서 표출될
평가 지표에 대해
어느 정도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유의미적 영향도가 미쳤는지에 대한
그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관계성을
정성적, 그리고 정량적인 수치로 입증한 바가 있다면 모를까.
사실, 대학은
“학업”과 “진로” 및 “취업”을 위해서는
검증된 전문가들을 고용하거나,
특수 전문 기관들을 설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학은 대신,
즉 외부로부터의 재원과 노력을 투자하는 대신,
“평생지도교수제”의 「진로개발 및 상담⌟ 과목을 통해,
내부의 재원과 노력을 제도적으로, 역으로,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1000명 이상의 교수와
25000명 이상의 학부학생과
450명 이상의 직원들의 재원과 노력을, 제도를 통해, 강제적으로,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학생은 졸업을 위해서;
교수는 시수를 채우기 위해서.
(2022/4/7; 목)
이문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