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이기“학” (3): 사유화의 관점에서>
전북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이문근 교수
일반적으로, 또한 전통적으로,
대학의 교육과 연구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대학에는 이러한 교육과 연구를 위한 많은 건물이 있다.
이번 담론에서는 소수의 교수들이 이런 공적인 공간을 어떻게 사유화하고,
이렇게 사유화된 공간에서 지도하는 대학원생들이 어떻게 사유화가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1. 전자정보공학 통합 과정에서의 공간 할당 문제
이전 담론들에서 논한 바와 같이,
관련학부가 전자공보공학부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대 6호관에 있던 컴퓨터과학과(컴과)가
공대 7호관으로 물리적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시, 5층이었던 7호관을 6층으로 다음과 같이 증축하기로 하였다:
1단계: 5층 우측윙 개축, 6층의 중앙과 우측윙 증축.
2단계: 6층의 좌축윙 증축.
그리고,
컴과의 자연대 6호관에서 공대 7호관으로의 이사는,
증측 1단계 이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당신 컴과의 책임교수였던, 필자는,
전자정보공학 학부장과 관련 전공의 책임 교수들과,
공대 7호관의 5층 우측윙과 6층의 전체를 컴과 전공의 전용 공간으로 합의를 한 바 있었다.
그런데, 막상, 1차 증축을 마치고, 컴공의 이사 시점이 되니,
5층 좌측윙과 6층의 전체를 컴과 전공의 전용 공간으로 사용하기로 했던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컴과에게는,
5층 우측윙의 공간의 50%만 할당해 주고,
6층의 중앙과 우층윙 공간의 전체를 할당해 주겠지만,
단 가장 중앙에 있는 공간은,
이전에 (5층 위의) 옥상에 임시건물로 있었던 “정보통신연구소”가 사용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 이유는, 이전의 (5층 위의) 옥상은 지금의 6층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5층 위의) 옥상에 있던 “정보통신연구소”의 위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증축된 6층의 새 공간에 그 “정보통신연구소”의 공간을 배정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나는 관련 교수들이, 소위, “알박이”라는 논리로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 과정에서, 컴과의 책임 교수로서,
전자정보공학부의 학부장과 타 전공 책임 교수들과
공간 배정에 대해 합의 무산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수년간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시 필자는,
증축되기 이전에 공대 7호관이 어떻게, 즉 어떤 전공과 교수들이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간의 크기가 얼마인지를 조사한 바가 있었다.
공대 7호관은 일반적으로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공간 이상의 공간이 있었다.
즉 공간이 남아 넘치고 있었다.
한가지 예로,
당시 원래 공대 소속이었던 컴공 교수들의 실험실 크기는
이사할 컴과 교수들에게 할당된 실험실 크기의 2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한 교수의 연구실이 1개 이상인 경우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한 실험실이,
하나의 실험실 규모의 공간 이 외에도,
여분의 교수 연구실 규모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원래의 합의를 깨트리고
증축된 공간을, 속된 말로, 빼앗아가는,
당시 공대 7호관의 전자정보공학부 학부장과 관련 세부 책임 교수들의 행태는
정말 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당신, 부교수의 신분이었던, 필자는,
원래의 합의 대로, 공간을 확보할 수 없음에, 무력함을 느꼈다.
같은 (자연대의) 컴과 전공의 교수들의 일부 정교수들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과 뜻을 같이 했었다.
하지만, 또 속을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2단계 증축으로 만들어질 6층의 좌측윙은 컴과 전용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과, 다시 합의했었다.
그리고 2년 정도가 흐른 뒤에,
2단계 증축이 끝나고, 6층의 좌측윙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어쩌랴.
다시 이 공간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었다.
공대 7호관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공간을 7호관의 학생들을 위한 강의실로 사용해야 한다고
당시 임용식 공대학장이 대변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
1차 증측에 대한 합의는 합의를 한 당사자들이 위반을 한 반면,
2차 증측에 대한 합의는 합의를 한 당사자들가 아닌, 공대의 책임자인 학장이 위반하려고 한 것이었다.
문제의 근원은, 아마도,
1차 증축 후에 벌어졌던 그 합의에 대한 배신이,
2차 증축 후에 다시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던, 필자의 무능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필자는, 이 문제를 당시 총장에게 보고했고,
총장과 학장과의 논의 하에, 최종적으로, 합의한 바 대로 공간을 할당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당시 필자가 정교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위험과 부담을 감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알게 된 일부 교수들의 공간에 대한 욕심은,
여러 유형으로 목격이 되곤 했었다.
예를 들면,
공대공학원소속의 컴공 학부의 한 연구소를
해당 연구소의 당시 연구소장이
자신이 지도하는 대학원생들을 여러 명 상주하게 함으로써
공대 소속의 연구소를 개인 실험실로 사유화하는 경우도 보았다.
2. 미국에서의 경험
필자는 우연히 미국에서 학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을 한 후에,
대학 시절은,
직장, 알바, 직장을 반복을 하면서,
버거운 학비를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석사를 졸업한 후에,
지도교수의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이후, 학비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박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도 몰라도,
우리 대학의 교수 체계와 미국의 교육 체계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1) 학부: 주립대
그 중, 주립대의 학부 과정은,
한국 대학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낭만적인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 프로그래밍은 필수적이었고,
과목마다, 프로그래밍 과제가 넘치고 넘쳐났다.
학기가 시작되면, 약 한달 정도는 여유가 있지만,
이후, 나머지 3달 동안은,
강의실, 도서관과 실습실을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았다.
자취방은, 결국, 여관이 되곤했었다.
종강을 앞둔 한달은, 과제 때문에 실습실에서, 주말도 없이 밤을 새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당시 기억을 되돌리면,
공부를 하거나, 과제를 할 수 없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한 적은 거의 없었다.
대학의 건물 어느 곳에서나 공부할 수 있었으며,
과제를 하기 위한 전산실도
대학교 소속 전산실, 자연대 소속 전산실, 컴퓨터과학 소속 전산실, 그리고 통합 전산실,
이렇게 4등급의 전산실이 있었고,
각 등급마다, 다수의 전산실이 있었다.
그리고,
신분증만 가지고 있다면,
거의 모든 전산실에서 작업이 가능했다.
필자의 경우,
컴퓨터과학과의 여러 과목의 실습 중,
과목의 유형에 따라, 필요한 컴퓨터의 사양이 준비된,
전산실에서 과제를 해야 했으며,
주말에는 주로 자연대와 공대의 전산실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IBM의 Mainframe을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대학교 본부에서 관할하는 전산소의 전산실은 활용을 하면 되었다.
이 전산실은 공대 8호관 만한 규모의 당신 최신식 건물이었다.
즉,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대부분의 공간이 교수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학원은 어떠했을까?
2) 학부: 사립대
필자가 다닌 대학원도 사립대였다.
일반적으로 사립대는 주립대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오래된 빨간벽돌 건물이
미로처럼 배치된 교정은 이미 도시의 일부분이 되었고,
학교를 다니다 보면, 도시를 배회하는 느낌을 가지곤 했었다.
하지만, 건물 안의,
닳을 대로 닳은 계단의 대리석과
낡을 대로 낡은 강의실의 책상과 의자는
학부의 주립대학교와는 전혀 다른 대학교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립대학교처럼,
학교의 대부분의 건물은 학생을 위한 공간이었다.
2-1) 공간
당시, 그 대학원 교수들의 연구실은, 현재 우리 대학 교수들의 연구실보다 적었다.
현재 소프트웨어공학과 정형기법의 세계 최고의 전문가 중의 한 명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교포 1.5세인 L교수의 연구실은,
사실, 필자 연구실의 2/3 정도의 규모 밖에 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어떨까?
학생들은, 대학원 과정에 입학을 하면,
10~20명 정도의 학생들이 생활을 할 수 있는 다인용 공간에
각 학생마다 책상과 컴퓨터 DEC VT100 Terminal이 주어졌다.
석사는 이 공간에서 1~2년을 생활할 수 있었고,
박사도 이 공간에서 1~2년을 생활할 수 있다.
박사의 경우,
[담론 7]에서 논한 바와 같이,
“종합시험” (Qualifying Exam)을 마치게 되고,
박사논문을 지도할 지도교수가 결정되면,
그 지도교수의 지도 하에,
2명의 박사 학위 후보생이 지낼 수 있는, 2인용 연구실로 배정되었다.
이 연구실은 우리 대학 교수 연구실의 1/3 정도의 규모였다.
이 연구실에는, 기본적으로,
책상과 책장과 DEC VT100 Terminal이 주어진다.
당연히 환경을 이전의 다인용 공간보다는 우수한 편이었다.
2-2) 박사 논문
(지금 부터는, 편의상, 현재형으로 기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실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논문을 쓰게 된다.
어떤 박사학위 후보는 2~3년 만에 논문을 쓴 후, 졸업을 하고, 연구실을 비우게 되지만,
어떤 박사학위후보는 5~6년 동안, 논문을 쓰지 못하고, 연구만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만약 지도교수가 과제가 있어서, 지원이 가능할 경우,
대학원의 다른 공간을 연구비로 임대를 해서,
그 공간에 최신식 사무실과 연구 장비를 준비한 후에,
그 과제에 해당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때부터는, 연구원이라는 신분에 해당하는 급여를 정당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연구비에 대한 간접비가 65% 이상이라는 엄연한 현실적인 조건이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도교수는 학생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두 지원을 해 줘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학에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주어진 업무에 대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학생의 의무는, 지도교수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경우,
지원을 받은 한 학기에, 그 지원에 해당하는 기술보고서(Technical Report)만 쓰면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박사논문을 쓰면 된다.
우리처럼,
학생들이 지도교수가 수행하는 과제의 업적으로,
학술논문을 등재지에 게재를 하거나,
국내외 학술대회에 참석해서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는다.
특히, 사업단이 수행하는 사업의 평가 지표에 부합하는,
소위 SCIE급의 논문을 위해,
박사학위의 졸업 요건에, SCIE급의 논문도 요구하지 않는다.
2-3) 박사후 과정
그리고, 졸업 후,
박사학위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업에 진출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연봉이 신임 교수의 2배 이상이며,
대학은 연구 중심인 반면,
기업도 연구팀이 있기는 하지만,
연구의 내용이 실용성을 요구하는 기술과 제품 또는 서비스를 다루기 때문에,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위자들은, 졸업 후, SCIE 급 논문에 그리 급급해 하지 않는다.
반면,
대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연구와 교육에 관심이 많는 박사학위자들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고등학 선생들도 박사학위자가 의외로 많다.
그 이유는, 먼저,
중/고등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전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아야 하며,
그 연장 선상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도 박사학위자의 선생을 예우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의 교수가 되고 싶은 박사학위자가 있다면,
교수가 되기 위한 학술지 논문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본인의 논문과 관련이 있는 연구소에
단기간 연구원으로 취직을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다.
또는, 학위논문과 관련된 능력 있는,
타 대학의 유명 교수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 대학의 박사후(Post-Doctorial) 과정을 통해서,
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 학술 논문을 쓰게 된다.
당연히, 그 지도교수는, 박사학위자에게,
박사후(Post-Doctorial) 과정에 해당하는 연봉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교수의 추천서이다.
미국의 교수들은 학생이 부탁을 한다고 무조건 써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2~3년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소위, 좋은 논문을 쓰게 되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대학의 조교수, 또는 부교수로 임명되는 것이다.
과거, 한국에서 유학온 컴과 전공자들은,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
Bell Lab에 연구원으로 단시간 취직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2-4) 미국의 교육 철학: 학생과 지도교수의 관계
이처럼, 대학원학생과 지도교수의 관계도,
일반적으로 지도 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처럼, 지도교수의 문하생이란 개념이 희박하다,
또한, 대학에서는, 동족배양이란 개념도 없다.
학생이 대학원에 입학을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합시험” (Qualifying Exam)이다.
이후 학생은 논문의 주제를, 일반적으로,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이 “스스로” 지도 교수를 찾아가서,
그 논문의 창의성과 도전성과 실현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면, 지도교수가 논문심사위원을 정해준다.
그래서, 그 심사위원회에서 제안서(Proposal)을 제출하고,
그 타당성을 입증을 받으면,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지도 하에, 학생은 “스스로” 논문을 써야 한다.
그리고, 논문이 완성이 되면,
논문심사위원에 논문을 제출하고, 최종 논문 심사를 받게 된다.
이를 Dissertation Defense라고 한다.
이렇게 심사에서 논문이 통과되면, 비로소 박사학위가 주어진다.
이 모든 과정에서 지도교수의 개입은 최소화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주인공은 학생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은 학위를 받은 이후에 “스스로”의 전문적인 삶을 위해 그 대학을 떠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학생은 졸업한 그 대학에서 Post-Doctorial을 하지 않는다.
또한, 졸업한 그 대학에 조교수나 부교수는 처음부터 “거의” 될 수 없다.
만약 그 대학에 임명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그 졸업생의 연구결과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이며,
이 또한,
동족배양 제한이라는 원칙에 의해,
졸업자의 출신 대학에 임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한,
박사논문이 우수하다고, 또는 이후 SCIE급의 논문이 있다고 해서,
박사학위자가 아무 대학이나 바로 입명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대학의 각 전공에,
특정한 대학 출신의 교수 비율이 특정 비율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한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학습의 다양성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학습의 다양성이란,
특정 대학 출신들이 배운 전문 지식은 그 대학의 특정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대학 출신들이 강의하는,
그 대학의 학풍과 교과 과정 및 내용이 비례적으로 많이,
또는 치우쳐서 배우게 된다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대학의 출신으로부터, 다양한 학풍의 교과과정과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교육 환경에서,
가장 이상적인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인데,
특정 대학의 출신들에 편행된 교육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컴공의 경우,
교수들 중, KAIST 출신의 교수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혹자, KAIST 출신의 교수들이 많으면,
컴공의 KAIST 수준의 컴공이 될 거라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이는, 학생들이 입장에서는,
교육의 다양성이 주된 KAIST의 학풍에 의해 홰손됨을 의미한다.
또 하나 이유는,
한 대학 출신들이 다수가 되었을 경우,
대학의 운영 상,
한 대학 출신의 교수 집단이 전공이나 대학을 다원론적 입장에서 운영하지 않고,
그들의 출신 성분 비율이 대학과 전공의 운영에 비례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컴공에서는, 지금, 박사의 졸업 요건으로, SCIE급 논문을 요구하고 있다.
박사의 졸업 요건으로 SCIE급 논문을 요구하는 것을 필자는 미국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학생은 졸업 논문“만” 쓰도록 되어있다.
논문의 독창성과 도전성과 실현성은 본인 직접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지만,
독창성과 도전성과 실현성의 타당성 여부는,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논문심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즉,
독창성과 도전성과 실현성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논문심사위원회이 평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부 전문학술지를 주관하는 기관과 그들의 심사제도에 의해서 “다시”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원래, 이러한 학술지 논문은, 지도교수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혹시, 학생이 진취적이어서,
이러한 학술지 논문을 본인이 쓰고자 할 때는,
지도교수가 공저자로 같이 논문을 쓸 수는 있지만,
이러한 진취적인 학생의 도전 정신을,
교수들이, 억지로, 학생 박사학위 졸업요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학생에 대한 노동착취를 넘어 논문착취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컴공에서의 박사졸업 요건에서의 SCIE급 논문 게재는,
컴공 내 교수의 비중이 가장 높은 KAIST 교수들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그 KAIST 출신 교수 자신들이,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졸업요건으로 요구되었던,
이러한 SCIE 급 논문 게재를
지금의 컴공의 박사학위 졸업 요건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 KAIST의 이러한 졸업요건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요건이 없었다면,
KAIST는 수십년전부터 지금까지, 세계 100대 대학에 포함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KAIST 교수들의 업적도, SCIE급 논문으로 넘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러한 SCIE급 논문으로 연구재단의 과제를 독점하지 못했을 것이며,
전국에 거미망처럼 퍼져있는 제자들과 공동연구도 못했을 것이며,
지금도 이를 빌미로 공동으로, 다시, SCIE 급 논문을 양산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리고, 특히, 이러한 KAIST 급의 논문, 과제, 제자에 대한 독점적 “재”생산을 위해서,
그들의 제자들이, 그들의 대학에서,
박사학위 졸업요건으로 SCIE급 논문을 요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도교수와 졸업자 간의 관계를,
우리처럼, 지도교수의 문하생으로,
또는, 그 문하생의 동문으로 연장되지 않고,
졸업생 자신이 “스스로”의 독립을 해서 자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교육의 목적은 한 인간이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개체로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대학과 대학원 교육도, 결국은,
학사, 석사 및 박사 학위의 졸업자가,
우리 사회에서 한 명의 전문가로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교육에서는,
졸업생이 지도교수의 가방모찌가 된다거나,
연구과제의 참여연구원이 된다거나,
연구 논문의 동저자가 되는 일을,
거의 발생될 수 없다.
사실, 그래서는 안된다.
필자도, 이런 면에서,
필자가 지도했던,
박사학위를 받아 졸업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꼭 이런 말을 남긴다.
“앞으로 너희들의 인생은 도전(challenge)이다.
나는 그 도전을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였고,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뒤를 바라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오늘 이후, 나를 찾아오지도 말아라.
내가 너희들의 짐이 될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호랑이나 독수리가 되라고 지도했다.
늑대들처럼, 승냥이처럼, 몰려다니지 말고,
너희의 자신만을 위한 세상을, 멋있게, 살기를 바란다.”
지난 일이지만,
어떤 교수가,
일년에 한번씩,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지도하던 학생들을 모두 불러, 소위,
“지도교수와 문하생의 축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선을 망하게 했던,
붕당과 당파가 생각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결국,
대학의 공공 공간에 대한 비정상적인 일명 “사유화”와,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평생의 문하생들을 양성하는 위한 우리 대학의 현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은
절대, 필자만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기도할 뿐이다.
(2022/4/23;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