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이기“학” (4): 획일화의 관점에서>
전북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이문근 교수
선진국과 비교를 해 보았을 때,
한국의 교육은 학교 성적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전 과정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교과과정 외의 학원이나 과외가 빠질 수가 없다.
외형적으로,
교육부는 교육의 일반화와 보편화를 주장하지만,
피교육자의 현실은 교육의 특수화에 묻혀 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그 교육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교육부 산하 학교 현장은
우열반을 나누고,
심지어는 우등반을 위한 기숙사와 과외 학습에 묻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이번 담론에서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알아보고,
나아가,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 대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발생이 되는지,
만약 발생이 된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발생이 되는지 알아보자.
1. 획일화의 원인
이러한 획일화의 원인은, 인과 관계로 보자면,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권력화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교수; 고급 공무원 등과 같은 기득권을 중심으로
권력화가 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이런 기득권을 목표로 하는 것이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특수화의 목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인간을 하나의 종(種)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런 기득권화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
종의 입장에 보았을 때,
인간 모두가, 다 같이, 공부를 잘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능력은,
선천적(DNA), 그리고 후천적(사회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능력의 차이에 의해, 결과적으로,
학업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신체적으로 키와 몸무게의 차이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회적 관점에서,
각자 그 능력의 차이에 따라,
그 능력에 해당하는 역할, 즉 직업군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위, 필자가 주장하는 “다양성”의 의미이다.
어떤 면에서, 다양성은 자연의 필연적 성질이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진화”라는 “자연선택”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역으로, 다양성이 없거나, 취약할 경우,
진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국, 멸종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학생들을 획일화할 경우,
학생의 다양한 능력은,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의해 우열이 나누어지고,
최악의 경우,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학생도 우열 인간으로 나누어지게 될 수도 있다.
이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가치인 “평등”이라는 원칙을 위배하는 참사를 의미한다.
2. 해결 방안
필자는 청년기,
미국으로 이민 간 부모님을 따라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전 담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의 생활은 쉽지는 않았지만,
도전을 격려하는 미국 문화 덕분에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복한 형제의 덕에,
부모님과 함께, 독립을 하기 전까지, 한동안,
Art Museum이라는 동네의 언저리에 살 수 있었다.
이 동네는, 연립주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산층 정도의 수준을 가진 가정으로 이루어진 동네였다.
동네에는,
판사, 검사뿐만 아니라,
의사, 기자 및 교수를 비롯해서,
다양한 전문직을 가진 중년의 가장들이 많았지만,
블루칼라나 자영업자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 중에는 어려서 동네의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의 자녀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말에는 동네에서 같이 대화를 하거나, 행사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 저녁에 Bar에 가면, 다들 친구처럼, 반기며 대화를 하는 것은 익숙한 장면이었다.
여기에는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영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인도 구분하지 않았다.
필자는, 많은 동네 사람들이,
노년의 부모님을 항상 반기고, 예우를 갖추는 것에 항상 감사했었다.
당시, 필자는 이러한 동네의 분위기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위기의 바탕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미국의 문화가 깔려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러한 다양성이 선진국으로서의 미국을 만든 힘이라고 생각했다.
필자가 경험한 미국은,
우리 한국처럼,
학교 성적이라는 기준으로 획일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기득권 집단들이 끼리끼리 모여 길드를 형성하지도 않았고,
또한 이들 간의 신디케이트도 만들지 않았고,
특히,
이러한 기득권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간은,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리고 특히 인간적으로,
모두, 인간 앞에서, 평등했다.
그리고, 이 평등에 의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전적으로 직업임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지인들이 필자를 부를 때,
“L교수”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27년 경험으로, 자신있게, 말하건데,
필자를 L교수라고 부른 사람들은, 분명히,
그 배경에 귀천을 따지는 사고가 전제됨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와의 관계에서 분명한 어떤 이해관계가 전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First Name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 모두 First Name으로 부른다.
심지어, 회사에서 사장에게 First Name으로 부른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First Name으로 부르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검사나 판사를 “영감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그런 영감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감님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직업의 귀천이 극에 달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상징어는,
한국의 학생들이,
왜 그렇게 공부에 죽도록 매달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시어임에 분명하다.
3. “동아리”라는 대학의 길드 제도
필자가 강의하는 과목은, 거의,
이론과 실기의 비중을 50:50 정도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공에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학습, 즉 배우고 익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배우고 익힌 다음에는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학습한 지식을 오래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기를 하지 않으면,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없다.
이러한 실기는, 과목의 유형에 따라, 개인 실기와 단체 실기로 구분한다.
개인 실기일 때는 개인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지지만,
단체(팀) 실기일 경우에는,
팀원들의 능력이 중요하고,
이를 관리할 팀장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팀을 다양한 능력이 있는 학생들로 골고루 섞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특정한 동아리의 학생들이 한 팀에 다 모이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아리는, 특정한 선별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 회원들을 모집한다.
그리고, 당연히 지도교수도 따른다.
그리고, 이렇게 모집한 학생들과 지도교수를 가진 동아리는,
전공 내에서, 고등학교의 우수반과 같은 역할을 주로 하게 된다.
학부의 행사를 주도한다든지,
학부를 대표해서 경진대회를 나간다든지.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동아리의 회원들로 구성된 팀이,
제일 우수하게 팀과제를 마치겠지만,
수업을 진행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우열반을 나누는 것과 같이, 우열팀을 나누는 것은,
극히 반교육적이라고 판단하고,
개인 학생의 성적에 따라, Round Robin 방식으로 팀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에게 이러한 방식의 취지를 원칙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 이유는
초/중/고등학교부터 익숙해진,
학원과 과외와 우수반에 대한 학생들의 역학관계가
대학에서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4. 학부 교육 우열화의 원인
필자는 동아리를 지도한 경험이 거의 없다.
그리고, 필자는,
동아리를 지도할 만한 동기도 거의 없을 뿐더러,
동아리를 지도할 만한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기본적인 배경에는,
필자가 동아리를 지도할 경우,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비동아리 학생들을 역으로 지도하지 않는다는,
교육에 대한 형평성이라는 원칙 때문이다.
하여튼,
이렇게 팀과제를 수행하는 동아리의 활동을 고민하면서,
필자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었다.
이는, 동아리를 지도하는 지도교수의 실험실에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소위, 실험실 생활을 하다가
일부는 졸업 후에 대학원으로 진학을 한다는 것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20년이 넘는 동안에 이렇게 반복되는 현상을 보면서,
초/중/고등학교부터 익숙해진,
학생들의 학원과 과외와 우수반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아리의 역할과
이를 지도하면서,
동아리의 우수한 학생들의 실험실 생활 이후의 대학원으로의 진학이,
꼭,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탁월하게 우수한 학생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학구열을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대학원 진학을 격려했다.
“학문 자체는 발전적이며, 진화적인 것이며,
학문의 과정도 이와 같다.
우리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다른 우수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는,
학부의 우수한 학생들이,
“세계 100대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런 면에서, 요즘,
사업단에서의 학부생 연구원 제도나
평생지도교수제도를 통해서,
실험실에서 소위 “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을 보면,
저 학생들 중 또 어떤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나아가,
매년 가을학기마다,
“대학원진학홍보행사”를 보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한 학부 예비 졸업생들에게,
이러한 행사를 진행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가 정말 궁금해진다.
교육은 자발성을 기본으로 한다.
무엇이든지 제도화하는 순간, 타발적 또는 강제적이 된다.
학생들이
초/중/고등학교에서 겪었던,
학원과 과외와 우수반에 대한 기억이
대학에서의 동아리나 실험실로 연장되었다면
이는
학교 성적으로 우리 사회를 획일화했던
그 실체의 핵심이 이 대학에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022/4/26;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