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성과 양극화

글쓴이 이문근(전북대 컴퓨터 전공)

시간의 神

20대 초반, 그리스 아테네 박물관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많은 유물들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유물은 현재하는 ‘시간의 신’조각물이었다. 이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신, 즉 제우스의 아버지, 한손에는 저울과 다른 한손에는 낫을 들고 있는 크로노스가 아니었다. 내가 본 시간의 신은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의 조그만 조각물이었다. 한쪽 얼굴은 과거를, 다른 얼굴은 정반대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의 신. 이 신은 현재라는 시간의 정점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이 신은 우리 사회의 이중적 가치관을 표현하는 메타포와 같았다.


스크린쿼터

스크린쿼터제는 외국, 특히 미국의 문화로부터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라고 본다. 그래서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은 최근 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스크린쿼터제 폐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저항을 조직적으로 벌여가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고 있다. 나가가 FTA 때문에 피해가 발생되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나아가 외국의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과 국제적 교류를 하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우리나라의 영화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으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운동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본인들의 발등이 스크린쿼터제 폐지라는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WTO나 FTA에 반대하는 다른 단체들의 문제에는 매우 소극적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많은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의 주장과 생활은 매우 모순이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이다. 그들은 대부분 Benz, BMW, Audi, Lexus 등과 같은 호화로운 외제자동차를 사용하고 있다. 때에 때라서 외제자동차 자체가 그들을 상징적으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차별화시켜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들의 의식주 생활까지 자세히 조사해 본다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우르과이 라운드로부터 시작한 세계화가 WTO와 FTA로까지 강화되면서 외국에서 수입되는 공/농산물 때문에 무너져 내려가는 우리의 공/농업, 무너지는 기업들, 수없이 발생되는 실업자들,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이런 현상의 선두에서 이를 가속화시키는 존재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배우나 감독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렇기에 스크린쿼터제 폐지도 물론 반대하지만 한편으로는 WTO나 FTA에 공조적인 그들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해야 되는 것은 결코 아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다수인 우리 민중의 아픔을 담보로 한 혜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활은 그들만의 권리나 권한이 아니다. 스크린쿼터제 유지라는 권리만 주장하고 'Buy Korea' 생활이라는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만약! 스크린퀘터제 폐지가 그들만을 위한 밥그릇 싸움이라면 거창하게 운동이라 말하지 마라!


이철 철도공사 사장

이철의 경력은 화려하다. 삼선개헌반대, 민청학련 등과 같은 민주화 운동. 이후 정치활동을 통한 12, 13, 14 대 삼선 국회의원 및 다양한 재야 정치활동. 이러한 이력을 가진 이철의 철도공사사장 낙하산 취임은 그럴 듯해 보였다.

하지만 철도공사의 파업과정에서 보여준 ‘주동자 2천명 직위해제’를 들고 나온 이철의 발언은 전혀 그럴 듯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은 철도공사 노조가 주장하고 있는 철도공사의 공공성에 위배되는 극히 반민주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교육 및 의료와 같이 국민의 복지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여기에는 국민의 이동권에 대한 의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노조는 그 이동권에 대한 공공성을 주장한 것인데, 사장은 그것을 공공성과 정반대되는 영리추구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공사 사장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런 공사를 민영화하여 외국자본에 공사가 경영권이 넘어갔을 경우 국민의 이동권은 극히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어찌 이동권뿐이겠는가. 전력공사, 가스공사, 주택공사 등. 국민의 기본권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에게 상당히 많은 그리고 핵심적인 국부를 매각한 김대중 정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신자유주의에 앞장 서는 노무현 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론스타의 외환의행 매각 시도, 담배인삼공사에 대한 아이칸의 인수 시도 등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약 99억원(2006년 기준, 2005년 기준으로는 145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철 사장이 민생고에 허덕이는 일반 국민의 이동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쩜 너무 당연한 것일까?


WTO와 FTA

삼성전자는 2004년 57.6조원의 매출에 10.8조원의 순이익을 남겼고, 2005년에는 57.5조원의 매출에 7.7조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현대차는 2004년 27.5조원의 매출에 1.75조의 순이익을 남겼고, 2005년 27.4조원의 매출에 2.31조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이는 사상 최대의 순이익이었다. 그런 결과인지는 몰라도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이사진의 연봉은 수억에서 수십억에 이르렀고, 주식배당금 및 인센티브 역시 최고액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삼성전자와 현대차와 같은 기업들이 이러한 최대의 순이익을 남길 수 있는 다양한 요인과 조건이 있겠지만, 그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는 국제무역이라는 요소이다. 즉 국제시장을 개척하여 국내의 우수한 공산품을 수출하여 매출을 올리고 순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나 이러한 국제무역은 과거 자유주의에서 향해졌던 것처럼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특정 국가와의 무역에서 공산품을 판매했을 경우 그 특정국가의 무언가를 수입해 주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수입을 WTO나 FTA와 같은 기구가 제도적으로 그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과거에는 무력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협약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국제관계와 질서로 이행한다는 논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공산품이 팔림으로 당연 많은 농산품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피해를 보는 것은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이다. 또한 국제경쟁력이라는 차원에서 많은 기업들이 해외에 공장을 옮기고 국내자본을 그곳에 투자하고 있다. 역으로 국내에서는 이런 경쟁에서 밀린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당연히 높은 실업률이 발생하고 있다. 즉 대기업의 성장은 많은 농민과 중소기업 및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대기업의 성장과 순이익은 그 성장과 순이익을 담보로 희생한 농민, 중소기업과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야 한다.

재벌들의 순이익은 재벌에 의한 재벌에 위한 재벌의 잔치가 결코! 아니다.


동학혁명

2006년 최근에 발생되는 국내외 현상들을 바라보면 1894년 발생된 동학농민운동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 자유주의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던 열강들,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 등으로 구분된, 극도로 양극화 사회 계층. 더불어 부정부패한 왕권과 귀족이라는 요소가 현재의 상황들과 상당부분 일치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WTO, FTA를 앞세워 밀려오는 열강들, 중산층의 파괴로까지 이어지는 기득권과 일반 서민의 극도의 양극화 현상,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부정부패한 정치와 관료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나라와 목숨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기득권층이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많은 서민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모든 부분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 때문에 신음을 하고 있는 동안 소수의 기득권자들은 부와 권력을 누리며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2006년 지금도 112년 전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주장하던 東學 사상이 더욱 새로와지는 이유는 우리사회의 부와 권력이 아직도 대중과 괴리된 소수에게 집중이 된 까닭이다.

세계화와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제 2의 동학농민운동이 없으란 법도 물론! 없다.
 
(2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