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 만들기 3>

봄이 오면

글쓴이 이문근(전북대 교수 전자정보공학부)

그리움은 꿈을 만든다.


 

1. <문제아 만들기>를 위한 변명.

필자도 이제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아직 인생을 뭐라고 말할 정도의 연륜은 아직 부족하지만, 성장기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라면, 당연히 분별력 있는 ‘사랑’과 ‘관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을 말하라면, 당연히 가정교육과 자의식이 형성되는 시기의 학교교육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가정과 학교는 분별력 있는 사랑과 관심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현장이며 그 판단은 자의식을 형성하는 청소년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즉 강요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는 분별력 있는 교육이 실천되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교육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고, 청소년들이 성숙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한 사회적이며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인식 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성품과 성격이 형성되고, 나아가 가치관과 세계관이 구축 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인격의 주체로서 삶의 지식이 지혜에 이르는 틀이 마련되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인한 신념, 불굴의 의지와 투지, 철두철미한 자기관리와 같은 주관적 요인들하고는 분명 질적으로 다른 과정들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학교교육에서 청소년기 필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많이 미쳤던 중학교 시절을 소재로 한 <문제아 만들기> 라는 교육컬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시절 발생된 폭력과 차별의 현실을 기록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앞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청소년들에게는 발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때문이다. 지금도 친구들은 만나면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시절 감정적인 체벌, 실리적인 차별, 냉혹한 소외 때문에 학업에 관심을 잃거나 미래가 관심과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버린 경우들은 자주 발견하곤 한다. 특히 부모들이 권력과 자본에 소외되었던 친구들에게서. 물론 모두 지나간 일들이기 때문에 그저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교육 환경을 생각하면, 즉 ‘빽’(권력)이 없고 ‘쩐’(자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대를 이어 체벌과 차별과 소외에 시달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히 덮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일반화는 될 수 없지만, 학생의 답안을 알아서 작성해주는 선생들, 졸업식 때 학생의 능력으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으로 상을 받는 수상제도, 치마바람도 부족해서 바지바람 까지도 영향을 받는 내신제도 등.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쉬쉬하면서 부당한 과외와 평가와 체벌과 차별과 소외가 판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 필자와 친구들이 겪었던 그 시절의 차별과 체벌과 소외는 진정한 ‘과거’의 것이 되지 못하고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러한 차별과 체벌과 소외는 이 자본과 권력이 더욱 지능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새롭게 적응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도 우리 교육의 현장에 남아 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가세하게 이제 이러한 문제는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을 과정으로 보지 않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기성세대의 의도와 욕망이 다분히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도와 욕망이 발생된 이유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빈부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모순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강요당하는 집단은 일반적으로 부모들이 힘없고 가난한 학생들이다. 필자가 <문제아 만들기>라는 컬럼을 기획한 것도 늦게나마 교육자로서 그들을 진심으로 대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린 나이에 친구들이 차별과 체벌과 소외 때문에 겪었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에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름대로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기록은 대부분 나와 친구들이 평균 14살에서 16살까지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기반 하여 특정 주제별로 재구성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면 가명을 쓰지 않고 주인공의 성을 사용하였다. 이 기록에 절대 절망스러운 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절망 때문에 힘들어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다시 굳굳하게 일어서는 또 다른 희망을 향한 노력과 인내도 있다. <문제아 만들기>에서 필자는 이런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을 통해 청소년기의 교육의 중요성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자를 포함한 우리 세대의 한과 슬픔이 다음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이나마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봄이 오면.

봄이 오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두 분이 있다. 한분은 전주동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주사범학교(교대?)를 졸업하고 학교생활을 시작한지 그리 많이 되지 않았던 여자 선생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부분에서 과거에 대한 인간의 기억이 거의 50% 이상이 사실과 다른, 또는 주관적 해석 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면서 선생님은 결혼을 하셨고 학교를 그만두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2학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3월 중순인가? 등교 길에 물왕물 (이 동네의 이름을 사람들은 ‘물왕멀’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기억하기에는 ‘물’ 중의 ‘왕물’이라 하여 ‘물왕물’로 알고 있다.) 골목길을 통해 언덕을 넘어 동초등학교 삼거리를 지날 즈음 골목에서 나를 부르던 한복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1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연분홍색 저고리와 화사한 연노란색 치마 한복을 입고 계셨던 선생님은 내가 다가가자 나를 품에 꼭 껴안으며 좋아하다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과 지나가던 1학년 때의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 세워 놓고 또 이야기를 나누며 껴안아보고 기뻐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는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 좋았지만, 왜 선생님은 우리를 그렇게 골목에서 만나야 했는지, 그리고 만나면서 왜 눈물을 글썽이다 기뻐하셨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뒤에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고 난 다음, 우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돌이켜 그 시절,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절대 가치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하고도 소박한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항상 긴 여운과 그리움을 남기며 기억에 떠오른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제자들을 보고 싶어 그곳까지 찾아와 제자들을 기다리던 그 아름다운 마음을 정말 잊어버릴 수가 없다.

다른 한분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전주에 중학교 평균화가 된지 4년이 되던 1974년, 뺑뺑이로 청5를 받고 간 학교는 장승백이 넘어 평화동이 있는 XX중학교. 학교는 정말 설렁하기 짝이 없었다. 과수원, 논, 밭, 미나리깡 등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학산 중턱, 옥녀지 옆, 3층 건물 하나만 덜렁 있을 정도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야간학원에서 정식 학교로 인가가 되었던 2년 전에 오거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해서인지 학교는 여기저기 아직도 정돈되지 않은 모습들이 많았다. 이런 학교에 배정을 받아 이제 머리를 박박 깎고 중학교에 처음 왔을 때 교차하던 그 감정은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전혀 예상하지 않은 낯선 곳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강제적으로 분리된 느낌?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발생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거친 미지에 대한 공포? 하지만 성장이라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정막 같은 숨막힘? 졸업을 앞둔 초등학교 6학년말, 청5를 받고 XX중학교임을 확인하고 무엇인지 모를 서러움에 엉엉 울며 집을 가던 그 기억이 다시 살아오던 되뇌임들. 그런 학교에서 입학 전에 반배정을 위한 시험을 보고, 입학식 날 운동장에서의 익숙하지 않은 부산함으로 조회를 마치고 배정을 받은 반은 1학년 3반. 이 반의 담임선생님은 진XX 선생님. 어린이의 티를 벗고 이제 막 중학생이 되던 첫해의 담임선생님은 꿈같은 중학교 1학년 시절, 70여명의 학생들을 모두 개구쟁이처럼 품에 안아주시던 진XX 선생님이었다.

3. 진동맥주

이 담임선생님의 별명은 ‘진동맥주’였다. 이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은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다. 그리 어려운 숙제는 아니었지만, 숙제를 해오지 않는 학생들이 있을 경우, 선생님의 체벌은 아주 독특했다. 아니 체벌보다는 장난을 위한 전희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오른손을 손안에 계란이 들어갈 정도로 반쯤 쥔 상태에서 검지와 장지의 둘째 마디 끝을 약간 벌려 그 사이로 학생의 코를 잡은 다음 순간적으로 검지와 엄지의 둘째 마디 끝을 세게 조이면서 잡아 빼고 나면, 학생의 코는 병마개를 따는 상황과 유사하게 ‘딱!’ 소리 나는 동시에 학생은 ‘악!’ 비명소리를 내며 자신의 코를 움켜쥐었고, 이후 학생의 코는 금새 빨개지곤 했다. 이 상황은 꼭 맥주병을 따는 듯한 상황을 연상시켰다. 검지와 장지로 상징되는 병따개, 학생의 코로 상징되는 병마개가 덮힌 병머리, 검지와 장지에 의해 순간 강한 조임으로 코를 후려 따내는 행위로 상징되는 병따개의 병마개에 대한 순간적인 지렛대 행위, 그 결과, ‘딱!’ 소리로 상징되는 병머리에서 분리되는 병마개의 분리되는 마찰 소리, ‘악!’ 소리로 상징되는 병마개가 열리면서 터져 나오는 병 내부의 억눌린 진공의 탈출, 즉 ‘뻥!’ 소리, 그리고 술주정뱅이의 빨간 코로 상징되는 빨개진 학생의 코. 이런 선생님의 체벌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진동맥주’라 불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고 말았다. 이런 체벌 중에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많은 학생들이 아직 초등학교의 티를 벗지 못해 가끔 콧물을 흘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조금도 이런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콧물을 질질 흘리는 학생의 코를 거침없이 검지와 장지의 둘째 마디 끝으로 꼭 잡고 ‘탁’하고 진동맥주를 터트리고 나면 선생님의 그 검지와 장지의 둘째 마디에는 끈적끈적한 학생의 콧물이 점액상태로 찐득찐득하게 붙어 있곤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번 ‘씩’ 웃으며 검지와 장지의 손마디 끝에 묻은 콧물을 바로 그 학생에게 다시 그대로 되돌려주곤 했었다. 즉 손에 묻은 그 콧물을 학생의 볼이나 옷 그대로 쓱 문질러 닦아 주곤 했었다. 이 상황이 되면 교실은 온통 난장판이 되곤 했었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악’하며 빨간 코를 쥐어 감는 학생, 다시 그 콧물을 학생에게 닦아주는 선생님, …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낄낄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떤 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상황의 해학을 참아내지 못했다. 결국 선생님의 이런 독특한 체벌에서는 이미 체벌의 의미는 사라지고 선생과 학생 사이의 장난과 놀이만 남게 되었었다. 이런 상황은 또 어떤가! 진동맥주의 ‘맛’을 보기 전에 얼른 코를 푸는 학생의 모습은. 그 당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학생은 선택 받은 소수에 불과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책 뒤쪽을 ‘쭉’ 찢어서, 거친 면을 대충 구겨 문질러 약간 부드럽게 한 다음, 코를 ‘팽’ 풀고, 순서가 되면 선생님의 ‘맥주 맛’을 보기 위해 코를 오뚝 치켜세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맥주가 퍼지는 순간, 폭죽이 퍼지듯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교실!

3. 시, 그리고 이야기

우리는 이런 장난기 많은 진선생님에게 아주 섬세한 면모가 있음을 할 게 된 것은 학기가 시작된 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던 3월말 경이었다. 선생님은 엉성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교실에 본인이 직접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한 폭의 멋진 시(詩)를 가져와 교실의 창쪽 기둥 벽에 걸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라고는 초등학교 때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가 거의 전부였던 우리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시는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였다. (이 글에서는 이 시의 민족사적 의미와 영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0504_history_img1.gif

당시, 이 시에 나오는 단어에 대한 체험적 이해는 없었어도, ‘해원’, ‘노스텔지어’, ‘순정’, ‘이념’, ‘애수’ 등의 단어는 정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우리들의 심적․지적 성장을 유도하고 또한 스스로에게 기대하기에 충분한 단어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깃발’이라는 시가 적힌 하얀 화선지가 창가에서 바람에 조금씩 흔들라치면 깃발이 정말 살아 움직이는 같은 느낌과 환상을 주곤 했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마도 4월 중순 정도에 하루는 선생님이 버스에서 내려 무엇인가를 낑낑거리며 힘들게 가져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 것은 다름 아닌 꽃들이 반쯤 핀 한 그루의 진달래가 심어진 화분이었다. 선생님은 그 화분은 교실 앞 창쪽으로 놓고, 매일 물을 주게 했었다. 우리는 날이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활짝 피는 진달래꽃들을 보면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라는 시를 진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0504_history_img2.gif

그 시절, 만개되는 꽃을 보면서 어린 가슴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이 싹 트고, 또한 계절이 사람의 마음을 바람처럼 들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선생님을 이해하면서 우리반 친구들은 선생님을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우리는 한달에 한두번은 꼭 수업시간에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엄숙한 자세로 장황한 상황 설명과 함께,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었다. 여기에는 희노애락이 넘치며 우리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하고도 남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액션(Action)과 나레이션(Narration)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근현대 문학사를 대표하는 소설들과 서양의 대표적인 문학의 걸작선을 기반으로 각색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진선생님의 문학‧예술적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진 선생님은 시인이며 화가였다고 했었다.

4. 시와 같은 이별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하고 문학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게 된 것은 진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2학년, 3학년 때의 비문학적 교육(?!)에 대한 반발이 이를 더욱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학년 여름방학 숙제 중에 시모음집을 만들어 오는 숙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진선생님의 독창적인 요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는 시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쉽게 시를 접하거나 시집을 읽을 수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할 만큼 햇볕에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리며 놀기에 바쁘던 나는 방학이 거의 끝날 즈음, 방학숙제를 하려고 보니, 시모음집을 만드는 숙제가 보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누나가 창간호부터 거의 3년째 모아놓고 애지중지하며 보고 있던 ‘독서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이 있었다. 한참 문학소녀의 꿈을 꾸고 있던 누나에게는 정말 문학적 보고(寶庫)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신문을 보니깐 이 신문에는 매주 다수의 시가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왠 콩떡! 나는 누나가 외출을 한 사이, 순식간에 신문에서 있는 시들을 가위로 쓱싹 쓱싹 잘라 정말 멋있고 환상적인 시모음집을 만들어 버렸다. 방학이 끝나고 난 다음, 난 학교에서 이 시모음집 때문에 선생님으로부터 정말 극찬의 찬사를 받았고, 집에서는 누나에게 몇주째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우리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을 올라갈 즈음, 진선생님은 우리 학교를 그만 두고 다가산 근처에 있는 선생님의 모교인 XX중학교로 자리를 옮기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2학년이 되자 우리는 학교에서 진선생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2학년이 되어서 우리는 1학년 때 진선생님과 함께 만들어진 그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순식간에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고 짓이겨지게 될 수 있는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5. 동해바다, 그리고 깃발

돌이켜 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부정적인 것들도 많지만, 특히 1학년 시절의 기억은 혼자 있으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자유와 낭만이 깃들여 있다. ‘깃발’과 ‘진달래 꽃’처럼 친구들과 모악산, 귀산사 뒤편으로 넘어가는 해와 햇살을 바라보며 어린 꿈과 소망을 이야기 하던 시간들. 이른 하교길에 정처없이 산으로 고개로 논과 밭으로 돌아다니다가 해 기우는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친구들과의 놀이들. 수업에서 새롭게 접하는 수학, 물상, 생물 등에서 배우던 도표와 그림들, 그리고 반나(半裸)의 비너스상을 그리며 예술의 순수와 의미로 열변을 토하시던 미술선생님 등. 각 과목들마다 처음 접하는 새로운 원리의 인과관계와 적용에 대한 정확성들은 진실로 어린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끝없는 상상력 속에서 다양한 창의력을 발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의 중심에는 강요와 강압이 아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는 주인의식, 즉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는 ‘분별력 있고 편견 없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생각한다. 결국 타의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나 자신을 포함한 자연과 사회에 관심을 잃게 하고 상상력을 약화시키며 결국 창의력을 파괴하고 만다는 것을 나머지 중2년과 고3년 동안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던 첫해, 여름철이 지난 바닷가를 따라 무전여행을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바라보던 그 짙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어디에선가 진선생님을 만날 것 같은, 아니 그 1년 동안의 향수와 그리움이 몰려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창가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진선생님의 ‘깃발’이 연상되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가장 소외를 많이 느꼈던 사춘기를 보내고, 20대를 바라보던 시기, 성장기에 가장 따뜻하고 편견 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절이 비로소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이제 비로소 그 ‘깃발’에 진심으로 제자의 시 한편을 보낸다.

(20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