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주의 : 동북공정과 황하공정

 

글쓴이 이문근(전북대 컴퓨터공학 교수)

민족의 역사 약탈

지금은 중국의 땅이 되어버린 중국의 동북부 지역. 중국정부는 현재 이곳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은 현재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 존재하던 과거의 모든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현재 중국의 지역사로 편입하고자 하는 정책입니다. 이 정책에 의해 중국정부와 학계는 과거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지역사로 편입시키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 고대 국가들의 유물과 유적을 UN의 중국 세계유산으로 등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고대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과거 한(漢), 당(唐) 이 후 송(宋), 명(明)과 같은 중국의 중대 국가와 끊임없이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이들 국가의 흥망성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중대 유목민족국가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국가가 원(元), 금(金), 청(淸) 등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이들 유목민족 왕조들은 고려와 조선을 형제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고려는 원이 형제국가로 인정하고 독립국가의 지배구조를 허락한 유일한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을 지배하던 초기 청은 조선에게 왜군을 퇴격하기 위한 군사지원을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지배한 후 중국에 대한 통치 참여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정과 제안의 배경에는 원와 청의 역사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들의 민족사적 기원이 고려와 조선 민족사적 기원, 즉 고구려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복공정의 중국식 해석

현재 중국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근현대사를 통해 영국, 일본, 미국 등과 같은 제국주의국가들과 손을 잡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던 반 민족/민중/민주 정부와 지배계급으로부터 벗어나 중국식 사회주의의 실현에 매진하던 중국이 더이상 아닙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의 자본에 의해 대규모로 세계자본에 급속하게 편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제 지표와 변화는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즉 이제 중국은 더이상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엄연한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국내외 정책의 기본 철학도 이러한 자본주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과거 역사와 문화도 현재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동북, 서북 공정 등 입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에서 중국적 자본주의적 가치와 논리가 반영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 및 ‘자원’은 현재 중국의 국가적 이해를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논리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논리일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은 현재의 ‘中國的’ 가치는 과거의 中華的, 즉 다수인 漢族的 가치와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중국내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중국화, 자원의 중앙적 개발, 부와 권력의 집중화 및 양극화 등을 보면 그 정도가 얼마인지 심각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지역에서의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도 이러한 정책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대외적으로는 소수민족과 같은 민족국가와의 관계입니다. 대표적인 국가가 남북한, 몽고, 인접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월남 등입니다.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이러한 국가와의 국제관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행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북공정과 같은 ‘공정’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티벳에 대한 중국의 점령과 지배처럼 힘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거나 결정적 명분이 있다면 식민지처럼 대상 국가에 대한 중국의 침략과 직접 지배도 가능해 보입니다. 그 시도로서 베트남전쟁 당시 월남과 중국의 갈등을 들 수도 있습니다. 반제국주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월남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정당화, 고착화하려는 시도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 간에도 중국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월남의 대중국 관계는 부분적으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견제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지배 논리

인간의 역사는 침략과 지배의 역사입니다. 근래,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도 이런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 간에도 이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 또한 당연히 직간접적, 중장기적 경제적 이해관계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지배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즉 지배논리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의 결과 발생되는 이해, 즉 이익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과거 한 민족/국가가 다른 민족/국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배논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손사상, 혈통주의, 중화사상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 근거에는 지배자는 지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초월성, 우월성이 있으며, 피지배자는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열등성, 미개성이 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논리입니다. 특히 천손사상처럼 지배자가 하늘이나 신의 자손이라고 하는 논리는 영원불멸한 절대전능한 지배의 논리입니다. 이런 논리를 통해 얼마나 순종적이고 자발적으로 만드느냐가 성공적인 지배의 결실을 얻는가를 결정짓습니다. 과거 황금의 땅, 콜로라도를 찾아가던 유럽 백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일신과 예수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등을 침략/약탈하며 이러한 논리를 강요했습니다. 이라크를 침공하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예수와 무함마드가 모두 같은 신의 아들인데도 예수의 이름으로 무함마드라는 신을 지배한다는 논리입니다. 신이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의 심오한 의지를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역사적 진실의 은폐 방법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들이 엄연히 현실 속에서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야와 잉카의 유적입니다. 어떤 절대비문의 지배논리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산물들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지배자의 현실 또한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를 부인할 수 없다면, 즉 인정한다면 그 결과 지배자의 정당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자의 딜레마(dilemma)입니다. 피지배자 입장에서는 이래서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배자의 선택은 당연히 그 역사적 산물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흔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전을 파고한다든지 기록물을 없앤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이 마야나 잉카의 신전을 부수고 그 재료로 그 자리에 성당을 만들거나, 그들의 고유한 그림문자기록들을 소각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둘째는 파괴하기 어렵고 복잡한 산물들은 지구인이 아니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퍼트리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마야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화성에 있는 외계인이 지구 땅속에 살면서 현지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에는 유의해야 할 점은 마야나 잉카인들이 믿는 신이 만들었다면 큰 문제가 발생됩니다. 왜냐하면 스페인들이 믿던 지배논리의 근거인 유일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 외계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셋째는 피지배자의 역사를 지배자의 역사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와 이집트의 역사입니다. 과거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근대 유럽인들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의 지배를 받는 이집트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백제의 지배를 받던 일본이 식민지를 통해 일본의 지배를 받던 백제로 바뀌게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했던 것과 같습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북미원주민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가장 잔인한 방법이지만, 넷째는 그 역사의 주체를 멸살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지배과정에서 피지배집단의 저항이 아주 강하거나 지배 후 이용가치가 아주 낮아 지배 논리가 먹혀들지 않을 경우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페인이 쿠바의 원주민을 모두 학살한 것이라든가, 로마나 몽고가 전쟁 초기 저항 집단의 성(城)에 있는 모든 주민을 전멸/학살 시킨 것들이 있습니다. 로마와 몽고와 같은 경우 이러한 잔인한 전술 때문에 이후의 전쟁에서 무혈대승을 거둘 수 있었겠지만, 아메리카의 경우,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미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의 흑인들이 이동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중국의 지배논리

중국도 안팎으로 이런 지배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입니다. 중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정책과 ‘공정’을 보면 이런 논리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즉 공정을 통해 소수 민족에 대한 다수 민족의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중화우월주의가 표면화되고 나아가 소수민족의 역사적 산물과 기록을 과거 중국의 지역사로 은폐하기 위한 역사조작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과 중국에서는 현재 중극의 강역안에 있는 모든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족왕조의 지배를 받았든 아니든, 혹은 다른 이민족국가의 지역일지라도, 모두 다 중국의 역사이자, 중국의 지역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이는 시간 속에서 현재라는 시점의 공간이 4차원적으로 다른 모든 시간의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는 초시공간적 의미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즉 초현실적, 즉 신적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중국적 우월주의가 시공간을 초월한 중국적 천손사상 또는 신손사상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민족’ 공정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문제는 현재 중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淸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화주의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소수민족의 지역사를 조작할 수 있었던 지배논리를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의 동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한은 근‧현대사에서 청으로부터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역사적 정통성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중국’의 우월주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비록 청이 한족을 지배하긴 했지만 결국 한족의 우수한 문화에 흡수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한족국가인 중국의 논리로 비약됩니다. 이는 동북공정의 또 다른 일면입니다. 즉 어떤 역사적 사실도 중국의 제일주의와 우월주의적 논리에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漢족들이 명을 무너뜨린 청(만주족; 여진족)에 항거하고 漢, 唐, 宋, 明에 이은 漢族왕조의 부활을 고대하던 중국의 역사가 현재 중국의 지배논리를 위해 청나라를 역으로 이용하는 논리는 역사적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청이 명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민중의 요구를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통해 개혁적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논리는 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중국은 지금 元의 역사마저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던 원. 그 원의 중국화를 통해 전세계의 역사를 중국의 지역사로 편입하고자 하는 ‘야망’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현재의 몽고가 국제관계에서 눈dpt 가시일지도 모릅니다. 소련 해체 전까지는 소련 때문에 어려웠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적절한 시기가 되면 티벳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수’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지역에서 유구하고 수려한 고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빼앗기 위해 중국은 어떤 ‘야망’을 꿈꾸고 있을지 모릅니다. 즉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우리가 국제관계에서 눈엣 가시일지도 모릅니다.

‘문명’ 공정

중국의 ‘공정’은 소수민족이나 지역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는 황화문명보다 앞선 홍산 문명과 이전의 문명 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홍산문명 같은 경우는 황하문명보다 2~3천년이 오래된 문명입니다. 즉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입니다. 중국의 우월주의가 이제 만리장성을 넘어 전세계로 뻗어나갈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세계최고’라는 中華적 문명의 근거가 제시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중화적이라는 정체성에 의문을 낳는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즉 이 지역의 문명이 극히 ‘황하’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지역은 황하지역과 중원지역과는 아주 다른 문명, 극히 反中華的인, 즉 古朝鮮的인 역사적, 문화적 양식 및 가치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동북공정을 통해 겨우 2천년 내외의 고구려사를 지역사로 편입시키는 중국에게 이 지역에서의 7~8천년전의 역사를 중국의 지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되는 것처럼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도둑질하는 것과 문명을 도둑질 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왜냐하면 문명은 인간의 역사, 즉 인류의 근원을 도둑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까지 중국당국은 수십년 이상 이 지역에서의 유물발굴을 극비에 부치고 있습니다. 발굴 현장에는 중국의 극히 중국적인 학자와 당국자들을 제외한 다른 전문가와 집단의 방문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동안 이런 상태가 유지될지 모릅니다. 아니 이 과정 속에서 이 지역의 문명들이 중국적 ‘pre-황하’ 문명으로 바뀌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중국적 세계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이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 사람의 이름을 새겨보면 그 사람의 가치와 철학 등을 잘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는 동기적인지 결과적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적당한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나라의 이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이름에는 그 국가의 가치와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 그 가치와 철학을 표명하기 위해 이름을 짓습니다. 日本, 너무 극열하지 않을까요? 동기적이지만. 米國(일본/중국식 표현), 너무 상업적, 침략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결과적이지만. 中國, 너무 자의적이지 않나요?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가?! 중국이라는 이름은 중국적 가치와 철학, 즉 중국적 세계관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북공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중심과 변방의 가치가 소수민족의 지역사를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은 中國을 제외한 어떤 국가도 ‘中國’으로 인정할 수 없는 중국최고주의, 즉 중화주의의 필연적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중국


올해로 중국이 등소평(덩샤오핑)에 의해 1979년 미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지 28년째입니다. 근 30년 동안 중국은 일본, 미국 및 유럽 자본의 유입과 시장화로 빠르게 자본주의화가 이루지고 있으며, 세계시장에 편입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막대한 자본은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강택민(장쩌민)을 이은 호금도(후지타오)의 도전적 경제정책과 공격적 ‘공정’들은 중국을 영국, 일본, 미국과 같은 이전의 제국주의국가에서 보았던 쇼비니즘을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특히 동북공정측면에서 호금도가 1988년 티베트자치구 당위원회서기 시절 무력으로 소수민족의 독립세력을 초토화시킨 사건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런 쇼비니즘과 더불어 중국의 다양한 내적 문제가 표면화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시장도입과 자본주의화로 중국의 모든 가치가 상품화되면서 민족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도농의 갈등 등이 조장하며, 중국사회를 부/권력/문화/교육 등의 측면에서 극도의 그리고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듯합니다. 앞으로 중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 큰 땅덩어리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의 미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또한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의 중국을 보면 ‘몬스터’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용가리’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 잘못하다가는 중화주의라는 쇼비니즘에 취해 다른 모든 가치와 다양성을 부인하는 한족 ‘나치’를 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꿈

모든 인간은 다릅니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인종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 다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미시적인 측면에서도, 성과 나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가치관과 세계관도 다르고, 집안/성장/생활 환경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 다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르지만 평등합니다. 즉 인간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높고 낮음이 없이 같습니다. 이 같음, 즉 평등을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서로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문제가 발생됩니다. 즉 다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동일해져야 하거나, 다르기 때문에 우열의 가치를 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됩니다. 전자의 경우, 모든 다름이 하나의 형식으로 획일화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양성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의 독재화 시대에 볼 수 있는 흔한 과정과 결과입니다. 후자의 경우, 다양성은 인정되지만 그 가치에 차별이 생깁니다. 가치가 구조화된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형식과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양반과 상놈, 귀족과 노예, 식자와 무식자, 도시와 농촌, 동과 서, 남과 북, 남과 여, 長과 幼 등. 특히 쇼비니즘이 강요되는 사회와 국가에서는 이 두가지의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처음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했던 중국이라고 해서 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은 국수주의(쇼비니즘)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동북/황하/청원 공정 등을 통해 中國과 非中國 (즉 변방), 漢족과 夷족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非中國的 또는 非漢族的 가치를 中華의 가치로 통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되고 무서운 일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평등하다는, 민족과 국가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무시하는 非人間的, 非人倫的 행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도 전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06/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