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시적詩的 등가성等價性

 

이문근 (전북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1. 사유하는 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언명은 인간의 존재 가치가 인간의 고유한 사유思惟에 있다는 그 시대의 철학과 가치를 반영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언명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도 생각한다는 최근 연구결과를 볼 때, 이러한 존재의 전제조건이 사유라는 조건식條件式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데카르트적 인간의 사유는 동물의 사유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여러 관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다른 점은 사유에 대한 메타적 구조에 있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사유에는 인간의 사유 그 자체가 인간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동물의 사유에는 동물 사유 그 자체가 동물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유 대상에 대한 구조적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동물의 사유는 단순한 사유에 머무르지만, 인간의 사유는 단순한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메타-사유, 즉 초-사유에 이른다는 점이 데카르트 언명이 지닌 진정한 인간의 사유적 가치이리라.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지닌 사유적 가치를 시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나는 시를 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무명 시인의 언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시인의 존재 가치는 그 시인의 고유한 작시作詩에 있다는 그 개인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데카르트적 사유의 관점처럼, 작시의 메타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즉 시인의 작시에는 시인의 작시 그 자체가 시인 작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작시 대상에 대한 구조적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점, 시인의 작시는 단순한 작시에 머무르지 않고, 메타-작시, 즉 초-작시에 이른다는 점이 데카르트 언명과 같은 관점에서 무명 시인의 언명이 가지는 진정한 작시의 가치이리라.

 

데카르트적 사유의 관점과 무명 시인의 작시의 관점이 바로, 독자들에게, (이하 시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관점에서 나-시인의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2. 메타-모순: 모순의 모순

 

-시인의 시 소재는 다양하지만,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자연과 사회 및 인간사에서 반복되는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시인이 밝히고자 하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에 앞서, 시인이 인식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확인해 보자. 시인은 세상을 모순의 집합체로 보고 있다:

 

우리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고

폭력으로 비폭력을 주장하고

학대와 무관심으로 참사랑을 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메타-패러독스가 된 시인일부


위 시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모순적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시인이 원하는 세상은 진실평화참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은 인간이 태초부터 꿈꾸어오던 유토피아 같은 세상일 것이다. 시인이 이런 세상을 원하는 이유가 이러한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 참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세상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를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인이 인식하는 세상은 단순한 거짓폭력그리고 학대무관심이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니다. 차라리 이런 세상이면, 이런 명백한 거짓폭력그리고 학대무관심을 제거하면, 시인이 원하는, ‘진실평화참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이 쉽게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고”, “폭력으로 비폭력을 주장하고”, “학대와 무관심으로 참사랑을 행하는위선과 모순이 만연한 세상이기 때문에 시인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이러한 위선과 모순을 시를 통해서 밝히고자 하면, 이 세상은 정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거짓폭력그리고 학대와 무관심이 또 다른 거짓의 거짓’, ‘폭력의 폭력’, ‘학대의 학대무관심의 무관심으로 다시 위선과 모순을 재귀적再歸的으로 반복할 뿐만 아니라, 더 악화된다고,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진실은 거짓의 거짓을 낳고

비폭력은 폭력의 폭력을 낳고

참사랑은 학대의 학대, 무관심의 무관심을 낳을 때

― 「메타-패러독스가 된 시인일부

 

자신이 그 모순을 밝히려는 노력이 결국 모순의 모순을 낳았다는, 즉 정반합의 관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귀적으로 반복한다는 모순의 구조성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모순으로 모순을 증명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모순임을 증명하는 메타-패러독스가 되었다

― 「메타-패러독스가 된 시인일부


이는 어떤 의미에서 운명적 절망을 토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에 접근할 때마다, 문제 자체가 끊임없이 그 문제의 본질적인 구조로 더욱 악화되는 모순을 안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픔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법의 본질적인 구조로 더욱 더 집요하게 그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 이를 시인은 메타 패러독스라고 정의한다.

 

메타 패러독스라는 운명에 직면하면서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시인은 자신이 꿈꾸는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무결성無缺性을 꿈꾼다

 

하늘보다 투명한

공기보다 시원한

풀잎보다 짙푸른

사람보다 따뜻한

그리고

철학보다 명쾌한

건전성健全性과 완전성完全性을 꿈꾼다

― 「메타-패러독스가 된 시인일부


건전성완전성이 보장된 세상. 언명의 전제조건이 참일 때, 그 결과가 거짓일 수 없는 건전성’, 그리고 모든 언명의 전제조건이 모두 참인 건전성을 보장하는 완전성’. ‘건전성완전성이 보장된 세상을 우리는 유토피아 또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하기 전에,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인이 제시한 구체적인 조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3. 1조건: 시인의 탈모순성

 

시인은 먼저 시인 자신의 탈모순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

― 「시인의 패러독스일부

 

이 조건은 그 유명한 그리이스의 소피스트인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시인 자신에게 적용하여 그 역설의 술어를 시인에 대한 역설적 조건으로 바꾼 것이다. 역설이란 주어진 하나의 문장 또는 명제에 대해 참과 거짓이 동시에 성립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런 역설들 중 하나의 유형으로 화자의 입장이 그가 주장하는 문장이나 명제에 종속되어 그 진위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다. 이 조건이 의미하는 역설적 진위성은 다음과 같다.

 

이 말이 참이면,

이 시인이 한 말,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라는 말이 허풍임으로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가 아니다가 되고,

 

이 말이 거짓이면,

이 시인이 한 말,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라는 말이 허풍이 아님으로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가 된다

― 「시인의 패러독스일부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시인들의 대상 범위를 규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를 귀납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통계적인 조건 하의 표본 대상을 우선 설정해야한다. 이렇게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허풍쟁이라는 진위성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원칙과 기준을 설정하는 것과 그 표본 대상에 대해 이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는 것 또한 객관적인가에 대한 판단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문제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증명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즉 이 주장이 참이라면, -이문근은 시인이고 시인들은 허풍쟁이임으로, 허풍쟁이가 하는 참인 문장은 역으로 거짓이 된다. 역으로 이 주장이 거짓이라면, -이문근은 시인이고, ‘시인들은 허풍쟁이임으로, 허풍쟁이가 하는 거짓 문장은 결국 참이 된다. 참이라고 가정하면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고 가정하면 참이 되어 버린다. 즉 역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진위와 결과를 밝힌다.

 

참이면 거짓이고

거짓이면 참이 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라도,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된다

― 「시인의 패러독스일부

 

어느 시인이라도/자기 자신을 포함해서/‘모든 시인은 허풍쟁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중요한 조건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시인이 밝히고자 했던 것은, ‘시인이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자신이 허풍을 떨거나 거짓을 말할 때이므로, 그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시인은 항상 허풍을 떨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된다는, 다시 말하면,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조건이 시사하는 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 자세를 버리는 순간, 그의 시는 자신의 시적 모순에 빠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경고임에 분명하다. 이 조건은 시의 메타적 제1의 성질이다. 그 다음 조건을 살펴보자.

 

 

4. 2조건: 자아의 상대적 순환 모순성 인식

 

진실만을 작시해야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시인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역으로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은 자신을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이 문제가 시인이 거론하고 있는 두 번째 조건이다. 시인은 자아에 대한 성찰을 거울 속에 있는 자신과의 대비對比로 비유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자신을 다음과 같이 두 개의 자아로 구분한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만 존재하는 너

― 「메타-딜레마일부

 

하나는 거울 앞에 선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거울 속에 있는 자아이다. 거울 앞에 선 자아를 주관적 자아로, 거울 속에 있는 자아를 객관적 자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객관적인 자아는 거울 속의 자아처럼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임이 강조되고 있다. 즉 다른 매개체를 통해서는 인식할 수 없는 자아. 주관적 자아가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객관적인 존재. 나아가, “영원한 합일체合一體의 시구처럼, 두 개의 자아가 결국은 하나의 자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그런 자아의 근본적인 성질을 부각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자아가 객관적인 자아에게 말한다.

 

네가 슬프면 나도 슬펐고

네가 기쁘면 나도 기뻤다

― 「메타-딜레마일부

 

주관적인 자아는 자신의 기쁨과 슬픔은 객관적인 자아가 기쁨과 슬픔을 느낄 때 비로소 성립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주관성은 객관성이 성립이 될 때 그 감성적 정당성이 성립된다는 절제된 그리고 통제된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먼저 기쁘고 슬퍼할 수 없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너도

내가 슬프고 기쁠 때

나만큼 슬퍼했고 기뻐했을까

― 「메타-딜레마일부

 

주관적인 자아가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슬픈 지를 객관적인 자아가 확인하는 이 상황은 절실하다. 그냥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까지 기뻐하고 슬펐는지를 확인하는 상황은 절실한 상황을 넘어서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자아가 가지는 객관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 역으로 객관적인 자아로부터 주관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경우와 부정적인 경우를 들어 그 믿음이 가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랬다면,

우리는 무한의 반영反映

그리고 영원한 합일체合一體

그러므로

더욱 슬프고, 더 더욱 기쁜 서로의 존재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한의 반영

그러나 영원한 합이체合二體

그러므로

슬프나 슬플 수 없고

기쁘나 기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

― 「메타-딜레마일부

 

여기에서 그랬다면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자아가 주관적인 자아와 같이, 아니 주관적인 자아만큼기쁘고 슬펐더라면 이라는 조건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두 자아는 한치의 차이도 없는 영원한 서로의 합일체가 된다. 그래서 기쁨은 기쁨의 기쁨이 되고, 슬픔은 슬픔의 슬픔이 된다는 완벽한 동일성同一性, 나아가 자아의 자아성自我性, 즉 주관성과 객관성의 일치가 구조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 두 자아는 한치의 차이도 없지만 서로는 영원한 하나가 될 수 없는 분리체, 그래서 기쁨도 기쁨이 아니고, 슬픔도 슬픔이 될 수 없다는 그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자아의 격리와 개별화가 성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객관적인 자아는 투명한 거울 속에 보이는 주관적인 자아가 인식하는 외형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객관적인 자아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느 누구든 다 의미할 수 있다. 즉 어떤 누구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이 주장하는 두 번째 조건이다. 즉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 세상은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그런 공동체 사회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에게 묻는다. 선택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다시 자문하다, 그 선택에 대한 자신, 즉 주관적 자아의 선택은 무엇이냐고.

 

너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리고 너의 선택에 대한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

 

너의 선택이 딜레마라면

나의 선택은 딜레마의 딜레마

― 「메타-딜레마일부

 

객관적 자아의 선택이 딜레마라면, 자신의 선택이 그 딜레마의 선택에 종속된 또 다른 딜레마임을 밝히고 있다. 딜레마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럼 우선 왜 객관적인 자아의 선택은 딜레마가 되는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선택은 그럴 경우이다. 이 경우는, 시인이 원하는 유토피아 세상, 모든 인간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은 유토피아의 정 반대의 세상, 즉 우리의 현실, 즉 기뻐도 기쁨이 아니고 슬퍼도 슬픔이 아닌, 냉혹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인간들이라는 관점에서 시인은 이런 인간들의 본질을 이 선택을 통해 이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시인 자신의 선택 또한 모든 인간들과 동일하게 또 다른 딜레마임을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다시 이상으로. 아니면,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상에서 다시 현실로. 이런 선택이 결국은 시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즉 시인의 선택은 객관화된 그 어느 누구의 선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인간적인 번민을 드러낸다. 시인이 외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내가 외로워지는 까닭은

네가 슬퍼도, 내가 슬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네가 기뻐도, 내가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너의 그렇지 않음에 대한, 나의 그렇지 않음의 가능성 때문이지 않을까

― 「메타-딜레마일부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인간적인 불안감을 겪는다. 즉 우리 인간들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그 초조함 때문에 그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 외로움은 단순한 외로움에 그치지 않는다. 이 외로움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라는 절망감을 시인은 딜레마의 재귀적 구조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더욱 외로운 까닭은

우리의 슬픔은 슬픔에 의한 슬픔이라는

우리의 기쁨은 기쁨에 의한 기쁨이라는

우리의 딜레마는 딜레마에 의한 딜레마라는

순환循環 때문, 순환의 순환 때문에

― 「메타-딜레마일부

 

선택이 딜레마라면, 선택의 선택은 딜레마의 딜레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시구는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 본능을 반영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의 원인이 단지 그 과정을 반복하는 순환에 있다는 논리 또한 윤회처럼 재귀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간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래서 기쁨과 슬픔의 원인이 이러한 본능적인, 나아가 운명적인 기쁨과 슬픔에 있다는 우리 인간의 기쁨과 슬픔의 구조성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구조적 한계에 다다른 시인의 선택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결국

내가 너에게 등을 돌리면

너도 나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또한

네가 나에게 등을 돌리면

나도 너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순간, 반영적反映的으로

그러나

거울 속으로, 영원히

― 「메타-딜레마일부

 

주관적인 자아는 객관적인 자아에게 말한다. 네가 등을 돌리면, 나도 등을 돌린다고. 또한 주관적인 자아는 객관적인 자아를 이해한다. 내가 등을 돌리면, 너도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별리別離가 반영적反映的으로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는 극단적인 반어법이다. 주관적인 자아와 객관적인 자아, 나아가 나와 너는, 절대 반영적으로, 영원하게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주장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또한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즉 이러한 운명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시를 쓰는 시인이 가져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말하고 있다. 이 조건이 시의 메타적 제2의 성질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존재란 무엇이며,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시인이 제시한 두 가지의 조건, 시의 메타적 성질로 규정한 시인의 탈모순성과 시인 자아의 상대적 모순성 인식이라는 조건들이 존재론과 인식론에 이르는 또 다른 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 메타 철학 : 존재=인식

 

서론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사유, 즉 존재라는 언명의 메타-사유적 관점을 거론했다. 즉 사유와 존재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메타적으로 밝혔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도 그 관계가 성립한다면, 우리는 사유=존재라는 등가성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존재, 즉 사유라는 언명의 메타-존재적 가설의 진위여부를 증명할 수 있다면, 두 언명, ‘사유, 즉 존재존재, 즉 사유라는 언명에 의해 사유=존재라는 결론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역논리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무명 철학자의 언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언명은 인간의 사유 가치가 인간의 고유한 존재에 있다는 그 시인-철학자 개인의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여기에서의 생각은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에는 인간의 사유 그 자체가 인간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메타적인 사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거론하는 존재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그런 사유가 가능한 존재, 즉 존재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존재로 메타-존재-존재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만이 스스로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진정한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이므로, 논리적으로 존재의 진정한 가치는 인식의 과정에서 성립이 된다. 그렇다면 인식의 과정이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물리적-존재이고, 반면에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는 메타-존재이다. 즉 이 언명들에서 발견하는 존재와 사유는 단순한 존재와 사유가 아니라, 메타-존재와 메타-사유를 의미한다. 즉 이 메타-관점에서 비로소 사유=존재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이는 다시 메타-사유 = 메타-존재라는 등식이 성립됨을 의미한다.

 

이 등식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이는 인식이라는 메타-사유 능력이 있는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즉 존재하는 순간마다, 내가 왜 존재하고,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신의 존재 원인과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이런 메타적 관점에서 시인의 시를 분석해 보자.

 

변증법의 정반합론에 의하면, 주어진 질서를 정론이라 보았을 때, 이 질서에 대한 모순에 대한 부정을 반론이라 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극복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합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인간의 존재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성장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 원인은 아마도 이미 밝힌 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메타-사유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여부와 의미와 가치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의문을 던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이 가진 메타-사유 능력의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기부정이 자연스럽게 시작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자기 부정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살펴보자.

 

시인은 시 정체성 상실의 원인에서 나는/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그래서 생각했고 고민했고 방황했다고 자기부정을 표현했다. 없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을 부정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자신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면, 이 말은, 자기부정을 시작했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말과 같다. 나아가 그 자신이 진정한 자신, 참자아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우선 부정한다는 말과 같다. 즉 참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부정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럼 시인은 왜 자신을 부정하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자.

 

시인은, 정체성 상실의 원인에서 나는/내가 아닌 누군가의/생각과 고민과 방황에 있었, 또한 매체와 과정과 결과에그리고 누군가의 판단에 있었다고 밝혔다. 시인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을 분석해보니, 자신은 참자아가 아니고 누군가의 사고와 의식과 가치에 의해서 존재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뜻이다. 즉 자신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자신은 참자아가 아니고 헛된 자아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나를 찾을 수 없었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현상을 분석한다.

 

이 분석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만의 고유한 구조적 사유성, 즉 메타-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구조적인 분석과 정의를 다시 발견한다. 즉 시인은 이런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원인을 발견하는 과정을, 정체성 상실의 원인에서 나는/내가 없는/내 안에서 나를 찾는/모순에 있었다”, 순환적 모순에 있다고 밝힌다. 즉 참자아를 찾는 자신이 발견한 자신은 결국 헛된 자아이므로 참자아를 찾는 그 행위 자체가 모순이라는, 즉 허구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 모순은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참자아를 찾으면 찾을수록, 참자아가 없는 전제조건에서, 헛된 자아만을 찾을 수밖에 없는 그 자체가 순환적인 모순임을 밝힌다. 즉 그 모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반복적으로 또는 정반합적으로 발생이 될 때, 그 현상의 내부에서 그 현상을 분석하지 말고, 그 현상을 외부, 즉 한차원 높은 단계에서 메타-구조적으로 파악해야한다는 의미와 같다.

 

이는 진실로 자신에 대한 시인의 냉혹한, 그리고 철저한 자기비판이다. 이는 시의 메타-사유에서 요구되었던 시인의 탈모순성과 시인 자아의 상대적 모순성 인식과 같은 수준의, 아니 그 이상의, ‘시인의 메타-존재에 요구되는 시인의 자기 메타-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참자아를 찾기 위해서, 나를 찾는 나에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사람명분기회가치철학실존까지 버리기로 작정한다. 그렇지만, 결국 나를 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버렸는데,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는데, 왜 자신은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없는가에 대해 분석한다. 시인은 여기에서 그 원인을 찾는 방법에서도 시인의 고유한 메타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시인은 그 원인을, “사람들은/가진 것을 버리면/자신을 볼 수 있다고 했다”(나를 찾는 나일부)는 점에서 찾는다. 타인의 삶을 살던 자신이 참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적용한 방법이 타인이 말한 방법을 다시 적용했다는 이 모순은, 이 방법으로는 자신의 삶을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운명적인 자신의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그래서 타인들이 거론하지 않은 자신만의 어떤 무엇을 더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발견되는 참 자아가 있다면, 그 자아가 정말 참자아일 수 있는가를 이 시에서 시인은 나는/무엇을 더 버려야/진정/나를 볼 수 있는가를 다시 반문한다. 그러나 너무도 모순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진정 버려야할 자신만의 그 무엇이, ,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부정을 다시 부정하고, 이 부정된 부정을 다시 부정하고, 이 부정된 부정된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들을 부단히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이 단순한 정반합의 반복적인 부정이 아니라, “거울 속의 거울처럼”,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부정, 즉 운명적인 부정, 그래서 이를 메타-구조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메타-부정임을 암시한다.

 

나는

거울 속의 거울처럼

나를 버리고 나를 찾는 나처럼

없는 나는 나를 버린 나를 찾고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처럼

나를 버리고 나를 찾는 나를 버리고 내가 버린 나를 찾는 나처럼

없는 나를 버린 내가 없는 나는 나를 버린 나를 버린 나를 다시 찾는다

― 「나를 찾는 나일부


나를 찾는 나에서 시인은 처절하고도 완고한 인간으로서 철갑 같은 자신의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은 시 메타-딜레마거울을 통해 시인이 주관적인 자아와 객관적인 자아에게 요구하던, ‘시인 자아의 상대적 모순성에 대한 인식상황보다 절실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은 방황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끝내는 투쟁까지 하는 것이다. 시인의 많은 시들이 시인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의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을 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운명과 영혼과 생명을 종교, 특히 불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고/폭력으로 비폭력을 주장하고/학대와 무관심으로 참사랑을 행하는사람들, 즉 가짜 지식인들을 특히 경계한다. 가짜 지식을 통해서는 이런 운명적인 순환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경고다.

 

그리고 결국 시인은 모든 부정이 극히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리고 그 존재의 모순과 허구를 인식하고, 그리고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운명이라는 인간의 굴레를 만나게 되는 이 과정 또한 하나의 필연적인 구조적 절차였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참자아를 발견하는 하나의 형식, 메타적 구조임을 인식한다. 메타적 구조가 메타적 의미가 된다는, ‘존재, 즉 사유라는 조건식과 이를 통한 존재=사유라는 메타적 등가성이 비로소 성립하게 된다.

 

시인이 진정 원하는 것은 참세상을 발견하는 것처럼 참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참자아는 메타-사유 능력을 가진 어느 메타-존재, 즉 어느 평범한 인간이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그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진정한 존재가치를 다음과 같이 깨닫는다.

 

존재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결정된다

― 「존재의 가치전문

 

존재의 가치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깨닫게 된다는 시구가 시인이 주장하는 메타적 모순과 메타적 가치의 구조성을 대비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의 가치는 바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영혼의 궁극적인 가치는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자신의 완성, 즉 해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참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모순까지를 포함한, 모든 반복의 메타적 의미는 윤회다. 그리고 그 반복을 이어주는 고리를 영혼으로, 그 반복의 힘을 생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메타 구조적 형식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한다.

 

인간의 역할이 내 윤회의 매개체라면

나도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존재라면, 이것은 선순환적 윤회가 아닐까

그런데 인간의 윤회는 너무 짧아서 내 윤회를 이해 못할지도 몰라

아마도 내 윤회 과정이 너무 길어서

인간들은 내가 윤회를 거치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선순환적 윤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땅 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오게 될 때쯤

인간들이 자신들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기를 나는 바래

나는 어차피 몇 번의 윤회밖에 남아 있질 않거든

내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삶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우리는 지구의 죽음과 함께 다시 새로운 물질로 태어날 거니까

― 「백령도 사곳바위일부

 

이 작품은 자기부정이 필연적인 자기긍정의 과정이라는 것과 인간의 생명이 영혼에 의해서 연결된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끊임없는 윤회의 형식이라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윤회의 의미는 무엇인지 성찰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명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켜주는 궁극의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성의 의미 또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6. 영혼의 꽃과 깨달음의 열매

 

시인의 메타-사유와 메타-존재의 등가성에는 영혼이라는 꽃을 피우고 깨달음이라는 해탈을 통해 그 결실을 맺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참세상과 참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자연도 생명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사랑 앞에서

네가 산 되면 나는 나무가 되고

내가 산이 되면 너는 나무 된다

― 「역설逆雪일부

 

그리고 시인은 참세상과 참자아를 이생에서 찾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고 기다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움이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이란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이란

오는 것도 없고

오지 않는 것도 없는 적막 속에서

 

찾아갈 수 없는 곳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다

― 「그리움이란전문

 

그러다가 혹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겸허하게, 그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아닌지, 이제는 다시 부정시작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단순한 치매려니 생각하자고 그는 제안한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치매에 걸렸다

깨달음인지 알 수가 없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치매에 걸렸다

깨달음이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깨달음이란 하나의 형식인 것을

치매 앞에

깨달음이란 한낱 물거품인 것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 「치매전문

 

죽음 앞에 이르러, 자기부정을 시작했던 그 삶을 돌이켜, 깨달음조차도 또 다른 순환의 구조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이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아가 시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 또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시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시의 메타포이며 메시지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리고 그 역으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인간 고유의 메타-사유메타-존재의 등가성이 가지는 영혼의 꽃의 가치와 그 결실로서 맺히는 해탈과 깨달음의 열매의 가치가 또한 지니는 그 영원무궁한 윤회의 결정체. 이것이 시의 상징이다.